1화
›눈을 떴는데 하늘이 아니라 협곡 절벽이 보였다.
정확히는 절벽 벽면의 이끼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무섭게 스쳐 지나가는 걸 보고 있었다.
낙하 중이라는 뜻이다.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뺨이 찢어질 것 같은 속도였다.
어릴 때 놀이공원에서 탄 자유낙하 놀이기구가 떠올랐는데, 그건 안전벨트가 있었고 이건 없었다.
그 차이가 지금 이 순간 굉장히 중요한 차이였다.
천 년을 수행했다.
영주(靈州)의 끝에서 끝까지 걸었고, 감령경이라는 걸 넘어서 그 위, 그 위의 위까지 올랐다.
새벽마다 절벽에서 물을 맞으며 호흡을 다듬었고, 겨울에는 얼음 위에서 좌관(坐觀)을 했다.
스승도 없이, 혼자서, 오직 근성만으로 경지를 쌓아 올렸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느 절벽에서 자유낙하 중이다.
인생 참 공평하다.
아니, 공평한 게 아니라 그냥 불공평한데 내가 애써 좋게 포장하는 것 같다.
쿠웅!
등이 먼저 바닥에 닿았다.
소리가 마치 이불 터는 소리처럼 둔탁했는데, 실제로는 뼈가 부서지는 소리였을 거라고 나중에서야 생각했다.
의식이 끊기기 전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아, 삼백 년 전에 죽었어야 했나' 하는 것이었는데, 이게 지금 다시 떠오르는 걸 보니 나는 또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럴 리가.
실눈을 떴다.
낯선 손이 보였다.
작고, 여리고, 손톱 밑에 흙때가 낀 그런 손.
내 손이 아니었다.
적어도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내 손은 이렇게 작지 않았다.
손등에 잔뜩 남은 상처 자국도 낯설었다.
누구 손이지 이거.
[영혼 전이가 완료되었습니다.]
이건 뭐지.
누가 나한테 말을 거는 건가 싶어 주위를 둘러봤는데 아무도 없었다.
허공에 글자만 떠 있었다.
마치 시스템 알림창 같은.
그런데 여긴 게임이 아니고, 나는 로그인한 적도 없는데.
회원가입도 안 했는데 왜 나한테 알림이 오는 거냐.
약관 동의도 안 했다고.
일단 몸부터 확인했다.
앙상한 갈비뼈, 툭 튀어나온 광대, 창백한 낯빛.
딱 봐도 잘 못 먹고 자란 몸이었다.
팔뚝은 젓가락처럼 가늘었고, 배는 등에 붙을 지경이었다.
숨을 한 번 들이쉬어 봤다.
텅.
허했다.
단전이 텅 비어 있었다.
아니, 비어 있는 게 아니라 아예 없었다.
경맥을 따라 기운을 흘려보내려 했는데, 흘러갈 길 자체가 무너져 있었다.
마치 재개발한다고 다 밀어버린 부지처럼, 여기저기 잔해만 남아 있었다.
포크레인이 지나간 자리마다 흙먼지만 날리는 그런 느낌.
전세 계약 만료돼서 살던 집이 통째로 철거된 기분이었다.
하.
웃음이 나왔다.
천 년을 수행해서 얻은 몸이 아니라, 어느 잡초 같은 소년의 몸에 들어와서, 그 몸의 경맥이 완전히 파괴된 상태로 시작한다니.
이건 뭐 로또를 샀는데 당첨금이 마이너스로 나온 격이다.
아니, 당첨금이 마이너스라는 게 원래 말이 안 되긴 하는데 지금 내 상황이 딱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협곡 바닥이었다.
돌부리에 걸려 몸이 배기고, 옷은 다 젖어 있었다.
물살이 세게 흐르는 개천 옆이었는지, 아니면 낙하하면서 어디 물웅덩이라도 지나쳤는지 알 수 없었다.
귀에서 여전히 이명이 울렸다.
삐이이이, 하는 그 소리가 마치 방금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느낌을 줬다.
기억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처음엔 흐릿한 안개 같았는데, 점점 선명해지면서 이름과 얼굴, 장면들이 밀려들어 왔다.
이 몸의 주인은 '고준'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이었고, 설랑부족 족장 고천룡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방금, 이복형제인 고흥이라는 놈에게 절벽에서 떠밀려 떨어졌다.
기억 속에서 고흥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비웃는 표정.
"넌 여기서 끝이다" 어쩌고 하는 대사도 들렸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기억이 흐릿했다.
아무튼 확실한 건, 그 자식이 나를 밀었다는 것.
왜 밀었는지는 뻔했다.
계승권.
어느 시대, 어느 세계든 권력 앞에서는 다 똑같구나.
형제끼리 절벽에서 밀치는 건 인류 보편의 클리셰인가.
드라마에서도 보고 뉴스에서도 보고, 하다못해 사극에서도 매주 나오는 그 레퍼토리를 내가 직접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이거 좀 성의 없는 전개 아닌가.
그리고 나는, 천 년 전 그 몸의 주인이던 나는, 주신 고성하에게 버림받은 채 죽어가던 참이었다.
천 년을 섬겼다.
천 년 동안 그의 신전을 지키고, 그의 이름으로 싸우고, 그의 시스템 아래에서 힘을 쌓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심지어 하늘이 무너지는 날에도 나는 그의 신전 앞에서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마지막에 돌아온 건 배신이었다.
천 년 치 충성심에 대한 답례가 뒤통수라니, 이건 무슨 최저임금도 안 되는 대우인가.
[시편식으로 말하자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런 말도 나한테는 사치였다.
내 신은 나를 목양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축장에 끌고 갔지.
목자라는 게 원래 양을 지켜주는 존재 아니었나.
내가 아는 신학은 그런데, 내가 겪은 현실은 좀 다른 것 같았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감정 때문인지, 아니면 젖은 옷 때문인지 구분이 안 갔다.
일단은 후자로 해두자.
감동적인 회상은 여기서 접고, 지금 당장의 문제부터 처리해야 했다.
과거를 붙잡고 우는 건 나중에 시간 남으면 하기로 했다.
지금은 생존이 우선이다.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팔에 힘이 안 들어갔다.
부들부들.
팔이 떨리는 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애초에 팔에서 소리가 날 리가 없는데, 이 정도로 근육이 없다는 뜻이었다.
헬스장 한 달 다니다 만 사람도 이보단 나을 것 같은데.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벽에 기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이 정도 움직임에 이렇게 숨이 가쁘다니.
천 년을 수행한 자가 이 정도 움직임에 헐떡거린다는 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되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현실은 언제나 말이 안 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바닥을 짚은 손끝에서 찬 기운이 올라왔다.
돌바닥의 냉기가 그대로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몸이 원래 이렇게 추위에 약했나.
아니면 이 몸 자체가 이렇게 부실한 건가.
둘 다 맞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협곡 안개 속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작은 점 같은 빛이었는데, 그게 서서히 커지면서 사람 형태도 아니고 짐승 형태도 아닌, 굳이 표현하자면 '검은 눈동자 하나가 통째로 허공에 떠 있는' 모양으로 변했다.
처음엔 눈을 잘못 봤나 싶었다.
피로해서 헛것이 보이는 건가.
그런데 눈을 몇 번 깜빡여도 그 형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뚜렷해졌다.
설마.
또 다른 신이 나를 데려가려는 건가.
한 번 버림받은 걸로 부족해서, 이번엔 아예 회수하러 온 건가.
이건 무슨 애프터서비스도 아니고, 불량품 회수하러 오는 택배 기사님 같은 건가.
그런데 이렇게 무섭게 생긴 택배 기사님은 처음 본다.
그 눈동자가 나를 향해 천천히 회전했다.
마치 이쪽을 스캔하는 것처럼.
동공 안쪽에서 뭔가 소용돌이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게 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으슬으슬.
한기가 등을 타고 올랐다.
젖은 옷 때문이 아니라 이번엔 확실히 감정 때문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경맥도 없는 이 몸이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뭐지.
저건 또 뭔데.
몸을 일으켜 도망치고 싶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향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처럼, 서두르지 않는 그 여유로움이 오히려 더 불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