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고흥이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속도가 심상치 않게 빨랐다.
걱정하러 오는 사람 걸음이 아니라, 확인 사살하러 오는 사람 속도였다.
마치 배달앱에서 '지금 조리 시작' 알림 뜨자마자 문 앞에 서 있는 그런 속도감이었다.
촤르르르륵!
밧줄이 절벽 벽면을 긁으며 내려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저 소리조차 재촉하는 것 같았다.
'빨리 확인해야지, 얼른얼른' 하는 조바심이 밧줄 마찰음에까지 배어 있는 기분이었다.
"준아, 살아있었냐? 다행이다, 정말."
얼굴에 걸린 웃음이 눈까지 닿지 않았다.
입은 웃는데 눈은 계산하고 있었다.
마치 편의점 알바가 손님한테 웃으면서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을 슬쩍 넣어주는 그런 눈빛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확실했다.
입꼬리는 위로 올라갔는데 눈꼬리는 그대로였다.
표정 근육 두 개가 서로 다른 회사에서 파견 나온 것 같은 부조화였다.
"형님 덕분에요."
일단 이렇게 말해줬다.
비꼬는 거였는데, 고흥은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였는지 표정이 살짝 풀렸다.
"그래, 다행이다 다행. 아버지께 얼른 알려야겠다."
말투는 급했다.
정말 급한 사람처럼, 마치 로또 당첨 확인하러 뛰어가는 그런 급함이었다.
아버지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고천룡을 말하는 거면 이건 진심으로 걱정해서 알리는 게 아니라 '진짜 죽었는지 확인해줄 사람 필요하다'는 뜻일 확률이 높았다.
[잠언식으로 말하자면, 원수의 환난을 기뻐하지 말며]
원수의 환난을 기뻐하지 말라는데, 이 새끼는 아예 환난을 만들고서 슬퍼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수준이 다르네.
이 정도면 그냥 연기과 특채로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고흥이 나를 부축한다며 팔을 잡았다.
손아귀에 힘이 은근히 셌다.
마치 '너 진짜 다시 못 일어나는 거 맞지'를 확인하려는 손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내 팔뚝을 눌러가며 뭔가를 재고 있는 느낌이었다.
경맥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회복이 얼마나 더딘지, 그걸 손끝으로 감정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괜찮아, 형님. 걸을 수 있어요."
실제로는 못 걸었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발바닥부터 허벅지까지 감각이 남의 것처럼 흐물흐물했다.
하지만 여기서 못 걷는다고 인정하면, 다음 수는 뻔했다.
"약해서 오래 못 살 것 같으니 편히 보내주자" 같은 그림이 그려질 게 뻔했다.
일단 허세를 부렸다.
비틀.
다리가 꺾였다.
허세가 삼 초도 못 갔다.
삼 초짜리 허세면 편의점 즉석 라면보다 조리 시간이 짧은 셈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고흥의 팔을 잡고 버티는 척을 했다.
"아이고, 형님. 절벽에서 떨어져서 그런지 다리가 아직 좀…"
"괜찮다, 준아. 무리하지 마라."
입으로는 무리하지 말라면서, 눈으로는 '얼마나 못 걷나' 관찰하는 눈치였다.
심지어 걷는 리듬까지 세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발, 두 발, 세 발째에 다리가 꺾이는지 체크하는 스톱워치라도 마음속에 켜놓은 모양이었다.
협곡을 빠져나오는 동안, 나는 210점이라는 숫자를 계속 곱씹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감정 수치가 조금씩 오르고 있을 것 같았다.
형이라는 놈이 걸음마다 은근히 팔을 세게 잡고, 은근히 발을 걸고, 은근히 옆으로 밀치는 데 어찌 화가 안 나겠는가.
걸음마다 새로운 방식으로 괴롭히는 창의력에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 인간을 괴롭힘 크리에이터로 채용해도 될 것 같았다.
[감정 수치가 증가했습니다. 210 → 224]
오, 이거 실시간으로 증가하는구나.
생각보다 유용한 시스템이었다.
형이 나를 괴롭힐수록 내가 강해진다는 구조라면, 이건 형한테 감사장을 보내야 할 사안이었다.
연말 시상식에서 '올해의 빌런상' 트로피라도 하나 건네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상 소감은 짤막하게, "형님 덕분에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부족 본진에 도착하자, 이미 소식을 듣고 나온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족장 고천룡, 내 생부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부족 제2강자 고천호, 고흥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사람들 사이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퍼졌다.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누군가는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두 부류를 구분하는 게 오히려 재밌었다.
고천룡의 표정은 복잡했다.
걱정하는 것도 같고, 뭔가 의심하는 것도 같은 얼굴이었다.
아들을 잃을 뻔했다는 감정과, 뭔가 이상하다는 감각이 동시에 얼굴에 걸려 있었다.
마치 계약서 한 줄 한 줄을 다시 읽는 부동산 중개인의 표정이었다.
믿고 싶은데 뭔가 걸리는, 딱 그런 표정.
"준아. 정말 무사한 게냐."
고천룡이 다가와 어깨를 짚었다.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부성애 때문인지 진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진심이 조금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 떨림이 진짜인지, 그냥 나이 든 손의 관절 문제인지는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어느 쪽이든 지금 나한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해석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았다.
"예, 아버지. 무사합니다."
대답하면서 다리가 다시 후들거렸다.
서 있는 것도 겨우였다.
발바닥이 땅을 딛고 있는 게 아니라, 땅이 나를 그냥 떠받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고천호가 옆에서 팔짱을 끼고 이쪽을 훑어보았다.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목숨을 건졌다니, 하늘이 도왔군."
말투에는 감탄이 섞여 있었지만, 눈빛에는 계산이 섞여 있었다.
감령경 후기 강자의 눈빛이라는 게 이런 건가.
사람 하나 살아있는 게 순수하게 기쁜 게 아니라, '이게 어떻게 가능했지'를 캐고 있는 눈이었다.
눈동자가 나를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스캔하는 게 마치 무인 편의점 카메라가 절도범 잡으려고 훑는 각도 같았다.
[감정 수치가 증가했습니다. 224 → 231]
의심받는 것도 감정 수치를 올려주는구나.
이거 완전 럭키비키다.
이 부족 사람들 전부가 나를 못마땅해할수록 내 능력치는 착실히 쌓이는 구조라니, 어쩌면 나는 이 협곡에서 제일 사랑받아야 할 사람일지도 몰랐다.
물론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하겠지만.
고흥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가 절벽 근처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준이 발이 미끄러지는 걸 보고 급히 뒤따라 내려갔습니다. 다행히 살아있어서 정말 안심입니다."
미끄러졌다.
산책하다가 우연히.
이야, 이 정도로 뻔뻔하게 각색할 수 있다니 감탄스러웠다.
마치 인터넷 밈처럼 '누가 봐도 밀었는데 미끄러졌다고 우기는' 그 클래식한 전개였다.
심지어 표정 하나 안 흔들리고 말하는 저 담대함은, 어디 가서 사기를 쳐도 성공할 것 같은 재능이었다.
[민수기식으로 말하자면, 오직 너희가 이같이 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 범죄한 줄 알라]
범죄했다는 걸 알라는데, 이 인간은 알 리가 없다.
증거가 없으면 범죄는 없는 세상이니까.
CCTV도 없고, 목격자 진술서도 없고, 있는 건 오직 내 절뚝거리는 다리와 형님의 뻔뻔한 웃음뿐이었다.
고천룡이 나를 향해 물었다.
"준아. 정말 그러하였느냐."
그 순간 주변 공기가 살짝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한테로 쏠렸다.
누구는 진짜 답을 궁금해했고, 누구는 이미 답을 알고도 시치미 떼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여기서 사실대로 말하면 어떻게 될까.
증거가 없다.
목격자도 없다.
고흥이 부인하면 그냥 내 말과 걔 말이 대립하는 구도가 될 것이고, 계승권을 다투는 상황에서 이건 진흙탕 싸움으로 번질 뿐이었다.
싸움이 시작되면 편은 나눠지고, 나눠진 편은 결국 힘이 있는 쪽으로 기울 게 뻔했다.
지금 힘 있는 쪽이 누구인지는 이미 답이 나와 있었다.
지금 내 상태로는 그 싸움을 감당할 힘이 없었다.
경맥이 붕괴된 채로 정치싸움까지 하면, 이건 그냥 자멸이었다.
자멸도 급이 있다면 이건 최상급 프리미엄 자멸이었다.
"…네, 발이 미끄러졌습니다."
거짓말을 했다.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속이 살짝 쓰렸다.
분노 수치가 또 오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는데, 웬일로 시스템 알림은 조용했다.
자기 손해 보는 거짓말은 감정 수치에 안 잡히는 모양이었다.
치사하게 그런 것까지 다 계산하는구나.
고천룡의 얼굴에 잠깐 안도와 실망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그 눈빛이 마치 '진짜 그런 거냐, 아니면 숨기는 거냐'를 동시에 묻는 것 같았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아들의 말을 온전히 못 믿는다는 게, 생각보다 씁쓸했다.
씁쓸함도 감정 수치로 잡히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이 자리는 이렇게 넘어갔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였다.
경맥은 여전히 붕괴 상태고, 몸은 여전히 폐인 수준이었다.
발이 미끄러진 게 아니라 형님이 밀었다는 진실은, 내 다리처럼 여전히 후들거리는 채로 어딘가에 방치돼 있었다.
사람들이 흩어지는 와중에도 고흥은 마지막까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유지했다.
연기력 하나는 인정해줄 만했다.
저 얼굴로 무대에 섰으면 대상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 고천룡이 부족 상비 노의사를 부르라고 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의사의 이름은 주명석.
부족에서 오래 신뢰받아온 인물이라고 했다.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내 경맥 상태를 정확히 진단할 수 있는 사람이 이 부족에 있다는 뜻이었고, 그건 곧 내가 지금까지 감춰온 것들이 하나씩 벗겨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내 진짜 몸 상태를 그 노의사가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궁금했다.
경악할까, 아니면 못 본 척 넘겨줄까.
아니면 그 즉시 고천호한테 달려가 보고할까.
셋 중에 뭐가 제일 최악인지 고르는 것도 참 재미없는 게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