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복수는 분노 1000점부터

4화

다음 날 아침, 주명석이 들어왔다. 오십은 넘어 보이는 백발의 노인이었는데, 걸음걸이만 보면 이 부족에서 무공 실력도 어느 정도 있는 듯했다. 발을 뗄 때마다 옷자락이 살짝 부풀었다 가라앉는 게, 딱 봐도 기운을 몸 안에 갈무리하고 걷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의술과 무공을 동시에 하는 사람이 흔한 건 아닌데, 이 부족은 인재 풀이 좁은지 겸업이 유행인 모양이었다. 현대로 치면 동네 내과 원장님이 태권도 4단쯤 되는 느낌인데, 그게 이상하게 여기서는 하나도 안 이상했다. "준 도련님, 진맥 좀 볼게요." 말투가 은근히 정겨웠다. 오랫동안 이 몸의 주인을 돌봐온 사람 같았다. 원래 고준이라는 소년이 몸이 약해서 자주 진맥을 받았던 기억이 스치듯 느껴졌다. 어린 고준이 마당에서 뛰어놀다 숨이 차서 주저앉으면, 이 노인이 헐레벌떡 뛰어와 손목을 잡아주던 장면 같은 것들이 파편처럼 지나갔다. 남의 기억인데 왜 내가 코끝이 찡해지는지, 이거 참 억울한 구조다. 손목을 잡히는 순간, 노의사의 표정이 확 변했다. "어…" 말을 잇지 못했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마치 계좌 잔액을 확인하다가 숫자 뒤에 마이너스가 붙어 있는 걸 발견한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출애굽기식으로 말하자면,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였느냐] 어찌 이런 일을 나에게 행하였느냐고 묻고 싶은 건 나였는데, 노의사의 표정을 보니 저쪽도 똑같이 묻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 억울한지 시합을 하자면 나도 할 말이 산더미였지만, 일단은 참았다. "도련님, 잠시만요." 다시 손목을 잡았다. 이번엔 반대편도 잡았다. 그러더니 옷을 걷어 등을 확인하고, 발목까지 확인했다. 심지어 관자놀이 옆에 손가락 두 개를 짚고 잠시 눈을 감기도 했다. 꼭 이삿짐센터 직원이 견적 뽑으려고 집안 구석구석을 훑는 것 같은 손길이었다. 다만 견적서에 찍힐 숫자가 이사비가 아니라 내 명줄이라는 게 문제였다.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소리가 굳이 표기해야 할 정도로 크고 깊었다. 방 안의 공기가 그 한숨 한 번으로 훅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경맥이…" 말을 하다가 멈췄다. 다시 손목을 잡고, 다시 놓았다. 마치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자릿수가 이상해서 다시 두드리는 사람 같았다. 0을 하나 더 눌렀나 싶어서 지우고 다시 눌러보는데, 지워도 여전히 이상한 숫자가 나오는 그런 상황. "경맥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이건, 이건 회복이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그렇게 확실하게 말해줘서 고마웠다. 덕분에 내 상황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확인사살까지 해주는 서비스, 이 세계는 참 친절하다. "방법이 없나요." 물었다. 노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의학적으로는 없습니다. 영단이나 영약도 소용없을 겁니다. 경맥 자체가 파괴되어 있어서, 기운이 흐를 수 있는 통로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요." 마치 도로 자체가 사라진 지역에 배달을 시키는 격이었다. 주소는 있는데 길이 없다. 배달앱 기사님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없는 도로를 새로 만들어가면서 갈 수는 없는 법이다. 리뷰란에 "배달 불가 지역이라 취소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뜨는 걸 상상하니 왠지 웃겼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닌데도 자꾸 웃긴 비유가 떠오르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정신줄이 튼튼한 편인가 보다. "도련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노의사가 목소리를 낮췄다. 주변을 한 번 살피고, 문이 닫혀 있는지도 확인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이런 상태로 살아 계신 것 자체가 이상한 일입니다. 보통은 며칠 안에 기력이 다해 명을 다합니다. 그런데 도련님은 지금 숨쉬고, 말하고, 심지어 걷기까지 하시죠. 무리해서 걷다가 쓰러지시겠지만, 그래도 이건 정상이 아닙니다."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 이렇게 반가운 말이 될 줄 몰랐다. 평소였으면 "정상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병원 세 군데는 더 돌아다녔을 텐데, 지금은 오히려 그 비정상성이 내 생명줄이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뭔가가 있다는 뜻입니다. 도련님 안에 뭔가가, 정상적인 의학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뭔가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노의사가 이렇게 정확하게 캐치할 줄은 몰랐다. 이 노인, 진맥만 오십 년 본 게 아니라 눈치도 오십 년 본 사람 같았다. 순간 대마천시스템에 대해 말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건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발설할 사안이 아니었다. 계약 조건에 정보 유출에 대한 페널티가 있는지 확인도 안 됐는데, 무턱대고 말할 순 없었다. 혹시라도 "정보 유출로 감정 수치 대폭 삭감" 같은 조항이 숨어 있다면, 그건 진짜 임대차 계약서 특약사항에 몰래 끼워넣은 갑질 조항 수준의 함정이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둘러댔다. 최대한 순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연기력 시험이었다면 이 순간의 나는 나름 합격점이었을 거다. 노의사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한 번 더 훑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손끝으로 내 손목 안쪽을 한 번 더 슬쩍 짚어보고는, 뭔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얼굴로 손을 뗐다. "일단은 무리하지 마시고, 정기적으로 진맥을 받으셔야 합니다. 상태가 조금이라도 변하면 바로 알려주세요." "네, 그럴게요." 노의사가 나가고 나서, 다시 방에 혼자 남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감정 수치: 231 / 1000] 이 상태로 몇 백 점을 더 채워야 각성이 온다는 건데, 도대체 얼마나 더 부정적인 일을 당해야 하는 건지 계산이 안 됐다. 231점을 채우는 데 걸린 시간을 생각하면, 1000점까지는 앞으로 이 짓을 몇 번은 더 겪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포인트 적립식 서비스인데 적립률이 지나치게 짜다. 형이 몇 번 더 괴롭혀줘야 하나. 아니면 더 근본적으로, 누군가에게 더 크게 배신당해야 하나. 차라리 적립 이벤트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이 시스템에 그런 배려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 방문 밖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고흥이었다. 발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알 수 있게 됐다는 게, 이 몸에 밴 습관인지 내 감각인지 헷갈렸다. "준아, 몸은 좀 어때."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얼굴에는 걱정을 잔뜩 발라놓았지만 눈은 여전히 계산 중이었다. 저 눈빛, 마치 재고 파악하러 온 창고 관리자의 눈빛이랑 똑같았다. "많이 안 좋다고 하네요." 일부러 솔직하게 말했다. 이런 정보는 어차피 노의사가 족장에게 보고할 텐데, 굳이 숨겨봐야 소용없었다. 오히려 형을 안심시켜서 경계심을 낮추는 게 지금 상황에서는 유리했다. 고흥의 표정에 미세한 안도가 스쳤다.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가는 걸 봤는데, 본인은 그걸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저런, 그렇구나. 안타깝다.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라." 입으로는 걱정, 눈으로는 안심. 표정 관리를 좀 더 배워야겠다, 저 형은. 학원이라도 하나 다니라고 권해주고 싶은데, 여기는 무공 학원은 있어도 표정 연기 학원은 없을 것 같았다. "형님,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응, 뭐든." "제가 절벽에서 떨어진 걸,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일부러 이 질문을 던졌다. 고흥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봤다. "글쎄, 사고였다고 생각하시겠지." "그렇겠죠."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른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 고흥은 내가 완전히 무력화됐다고 믿고 있다. 경맥이 파괴됐고, 며칠 안에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지금 당장 더 손을 쓰지는 않을 거다. 이건 오히려 기회였다. 사냥꾼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짐승을 굳이 다시 총으로 쏘지는 않는 법이니까. 형이 안심하고 방심하는 동안, 나는 조용히 시스템의 감정 수치를 채우면서 몸의 변화를 기다릴 수 있었다. 겉으로는 시한부 환자, 속으로는 적립 이벤트 참가자. 이 정도면 이중생활도 나쁘지 않았다. [감정 수치가 증가했습니다. 231 → 240] 방금 나눈 대화에서도 뭔가 감정이 올라간 모양이었다. 형의 가짜 걱정을 받는 것만으로도 240점이라니, 이 시스템 참 후하게 쳐주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노의사 앞에서 좀 더 억울한 표정을 지었어야 했나, 뒤늦게 후회가 됐다. 고흥이 몇 마디 더 형식적인 위로를 건네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창밖으로 해가 슬슬 기울고 있었다. 하루가 이렇게 또 지나가는구나. 그날 밤, 잠들기 전에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손끝에서 아주 미약하게, 마치 무언가가 흐르는 듯한 느낌. 따뜻하다기보다는 그냥 뭔가가 스치고 지나가는, 설명하기 애매한 감각이었다. 손가락을 오므렸다 펴봤다. 다시 그 느낌이 왔다. 설마. 혹시, 경맥이 아니라 다른 통로가 생기고 있는 건가. 노의사가 말한 그 도로, 없어졌다던 그 도로가 아니라 아예 새로운 골목길 하나가 어디선가 몰래 뚫리고 있는 건가. 확인해보고 싶은데,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냥 손끝만 몇 번 더 오므렸다 펴며, 나는 어둠 속에서 그 미약한 흐름을 계속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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