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장로님, 벌써 후회되시죠

1화

산 이름은 청류(靑流)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골짜기라고 불렀지만, 나는 그 산이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을 좋아했다. 이름을 가진 것들은 함부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런 근거 없는 믿음을 품고 있던 시절이었다. 봄이 오면 청류산 자락에는 진달래가 피었다. 붉은 꽃잎이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것처럼 번져나가면, 마을 아이들은 산비탈을 뛰어다니며 꽃을 꺾었다. 나도 그 아이들 중 하나였다. 다만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달랐던 것은, 손끝으로 눈을 만져도 눈이 녹아내렸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서한이다. 열 살 되던 해 봄까지는 그저 골짜기의 아이였을 뿐, 별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았다. 다만 마을 어른들은 종종 나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곤 했는데, 그건 내가 남들보다 유독 몸이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겨울에도 옷을 얇게 입고 다녔고, 손끝을 대면 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따스했다고 했다. 마을의 노파들은 그런 나를 보고 수군거렸다. 저 아이는 화신(火神)의 벌을 받은 게라고, 혹은 반대로 축복을 받은 게라고. 나는 그 말들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볼 때마다 웃음기 없는 얼굴로 손을 잡아주었고,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등을 쓸어주었다. 두 사람 모두 내가 어디서 왔는지, 왜 그렇게 몸이 뜨거운지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어린 나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모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자식의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고, 그렇게 여겼을 뿐이었다. 어머니의 손에는 늘 바느질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 호롱불 아래서 옷을 짓던 그 손이, 낮에는 내 이마를 짚어 열이 있는지 확인하곤 했다. 아버지는 나무를 베어 겨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넓은 등을 가진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릴 때면,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나무 냄새를 맡았다. 그것이 내가 알던 세상의 전부였다. 그해 봄, 산 아래 개천가에서 나는 소금을 잃었다. 소금이라는 건 우리 집 개의 이름이었는데, 그 녀석은 이상하게도 나만 보면 꼬리를 흔들며 배를 뒤집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이빨을 드러내면서도 나에게는 유독 순했던 그 개를, 나는 형제처럼 여겼다. 소금은 늘 내 옆에서 잠들었고, 내가 뜨거운 몸을 가졌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날도 소금은 개천가에서 나와 함께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한 듯 귀를 세우고는, 산 쪽을 향해 짖어대며 내달렸다. 나는 그 뒤를 쫓았다. "소금아! 소금아!" 이름을 부르며 산 중턱까지 올라갔지만, 개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나뭇가지를 헤치며, 발끝에 이끼가 미끄러지는 것을 느끼며, 해가 저물어가는 것도 모른 채 산을 헤맸다. 결국 소금을 찾지 못했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때야 나는 산을 내려오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가 걱정할 것이라는 생각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 붉은 빛이 단순히 저녁놀이라고 생각했다. 산 중턱을 돌아 내려오는 길,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연기 냄새가 먼저였다. 매캐하고 습한 그 냄새가 코끝을 찔렀고, 그다음엔 붉은 빛이 산등성이 너머로 넘실거리는 게 보였다. 저녁놀이 아니었다. 불이었다. 나는 뛰었다. 발밑의 돌부리가 발가락을 찢는데도 아프다는 감각조차 느끼지 못한 채, 그저 마을로 향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옆구리가 찢어지는 듯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산길을 다 내려왔을 때, 나는 마을 어귀에 서서 그대로 멈춰 섰다. 마을은 이미 불타고 있었다. 지붕 위로 솟는 불길이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타는 냄새와 함께 무언가 역겨운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그것이 사람의 살이 타는 냄새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다만 속이 뒤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었다. 골목마다 시신이 쌓여 있었다. 낯익은 얼굴들이 낯설게 뒤틀린 채로 흙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 사이를 낯선 사내들이 칼을 든 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산적, 이라는 단어를 그때 처음으로 실체와 연결시켜 이해했다. 옆집 아저씨였던 사람이 문지방에 엎어져 있었다. 매일 아침 나에게 인사를 건네던 그 얼굴이, 지금은 흙빛으로 굳어 있었다. 나는 그 옆을 지나며 헛구역질을 했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 쿠웅! 집 안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향해 몸을 던졌고, 마당에 쓰러진 어머니를 발견했다. 등에 칼이 꽂힌 채였다. 아버지는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이미 숨이 끊긴 얼굴로 어머니를 감싸안고 있었다. '왜.' 생각은 그 한 글자에서 멈추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고,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의 손을 붙잡았을 뿐인데, 그 손이 이미 온기를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손끝에는 여전히 바느질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 놓았다. 따뜻해지지 않을까. 내 몸에서 나오는 열기가 조금이라도 옮겨가면, 다시 눈을 뜨지 않을까. 그런 부질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손은 계속 차가워지기만 했다. 아버지의 등을 흔들었다. 넓고 단단하던 그 등이 이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나무를 베던 그 손이 지금은 어머니의 몸을 감싸안은 채로 굳어 있었다. 집 안에서 불길이 번져오는 소리가 들렸다. 타닥타닥,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열기가 등 뒤에서 밀려왔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어이, 여기 애새끼가 하나 남았는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사내는 칼끝에 아직 마르지 않은 피를 매단 채,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조차 늦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사내의 얼굴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 웃음이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으로 보였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 열 살의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운 좋게 살아있었네." 사내가 칼을 치켜들었다.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저 부모의 시신을 끌어안은 채로, 이대로 죽는구나, 하는 생각만 반복했다.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죽으면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칼날이 불빛을 받아 번쩍였다. 그 순간, 나는 소금을 떠올렸다. 산속 어딘가에서 아직도 나를 찾고 있을 그 개를 떠올리며, 미안하다는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 쐐애액! 무언가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렸고, 사내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붉은 것이 튀어 내 얼굴에까지 닿았지만, 그것이 두려움보다는 어떤 안도감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사내의 몸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렸다. 목이 없는 그 몸뚱이가 마당에 널브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보아버린 뒤였다. "살아있는 아이가 하나 더 있었군." 낮고 고요한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색 도복을 걸친 그 노인의 눈빛은, 마을을 태우던 불길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노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는데, 그 검신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방금 사람의 목을 벤 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노인은 천천히 검을 검집에 꽂아넣으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을을 불태우던 사내들은 이미 모두 쓰러져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노인이 서 있던 자리마다 시신이 늘어져 있었다는 사실만이 눈에 들어왔다. 노인은 내 앞에 쭈그려 앉아, 부모의 시신을 끌어안고 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동정도, 연민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물건을 감정하는 듯한, 그런 무심한 시선이었다. "몸이 뜨겁구나." 노인이 내 손목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체질을 가진 아이가 이 궁벽한 산골에 있을 줄이야." 노인의 목소리에는 옅은 흥미가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부모의 시신을 놓치지 않으려 손아귀에 힘을 주었을 뿐이었다. "놓아라. 이미 죽은 자들이다." "싫어요." 내 대답에 노인은 잠시 침묵했다.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와 무너져 내리는 지붕의 소음만이 그 침묵을 채웠다. "고집이 있구나. 그것도 나쁘지 않지." 노인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나를 따라오거라. 이곳에 남으면 너도 저들처럼 될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알지 못했다. 그 노인이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나에게 내리는 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그때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의 눈빛 속에서, 나는 어떤 거대한 것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만을 느낄 뿐이었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