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동네 뒷산 구품 토지신

1화

책을 펼치라는 소리가 세 번째로 들려왔을 때, 나는 이미 뒷문 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다. "도준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무겁게 깔렸다. 삼밭골에서 나고 자란 나, 이도준은 올해 열여섯이었다. 그리고 마을에서 유일하게 글을 배우다 도망친 놈으로 유명했다. 아버지 이만재는 젊었을 적 읍내 서당에서 몇 해 글을 익힌 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 시절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눈빛이 달라졌다. 붓을 처음 쥐었던 날, 훈장님께 칭찬을 들었던 일, 천자문을 다 뗐던 순간까지 손짓을 섞어가며 신이 나서 늘어놓곤 했다. 문제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하품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아버지는 아들만은 글로 입신하길 바랐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을 안다고 해서 하기 싫은 일이 하고 싶어지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 나는 태연하게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글공부는 배가 부른 사람이나 하는 겁니다." "..." 아버지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놈이! 배가 부르니 마니, 그게 지금 할 소리냐! 사내자식이 붓 한 자루 못 잡으면서 무슨 큰일을 하겠다고!" "큰일은 무슨. 저는 그저 밥이나 배불리 먹으면 됩니다." "이런 후레자식을 봤나!" 나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당을 가로질러 뛰었다. 뒤에서 아버지의 발소리가 따라붙었지만, 산길로 접어드는 순간 그 소리는 뚝 끊겼다. 아버지는 무릎이 좋지 않았다. 몇 해 전 지게를 지다 넘어져서부터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곤 했다. 산은 언제나 나의 유일한 안전지대였다. 숲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밑에서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나는 익숙한 걸음으로 산길을 올랐다. 어릴 적부터 도망칠 때마다 오르던 길이라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였다. 어디에 뿌리가 튀어나와 있는지, 어디쯤에서 오솔길이 갈라지는지, 손바닥 보듯 훤했다. 한참을 오르다 보니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산등성이를 넘어오고 있었다. 바람도 심상치 않게 불었다. 나뭇가지들이 서로 부딪히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오늘 안으로는 못 내려가겠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나는 낡은 돌계단을 발견했다. 이끼로 뒤덮인 계단은 산 중턱,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된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 사이사이로 잡초가 삐죽삐죽 솟아 있었고, 돌 틈에는 거미줄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계단 끝에는 사당이 하나 있었다. 지붕은 반쪼가리만 남았고 기둥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한쪽 기둥은 이미 아래로 기울어져 곧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안쪽에는 흙으로 빚은 신상이 놓여 있었는데, 코가 떨어져 나가고 눈썹 자리에 금이 가 있었다. 팔 한쪽도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없었다. 누구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낡은 상이었다. "삼밭골 토지신 사당인가." 나는 혼잣말을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귀동냥으로만 들어왔던 이야기였다. 예전에는 이 산 어딘가에 토지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고, 노인들이 술자리에서 지나가듯 하던 말. 실제로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비를 피할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했다. 신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젖은 소매를 대충 털어냈다. "신령님, 잠깐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딱히 믿지는 않습니다만, 이 정도는 봐주시겠지요." 신상을 향해 대충 인사를 던지고 자리에 앉았다. 빗방울이 뚫린 지붕 사이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후두둑, 소리가 점점 굵어졌다. 이내 빗줄기가 사당 안까지 튀어 들어올 정도로 거세졌다. 먼 하늘에서 번쩍, 하는 빛이 스쳤다. 뒤이어 우르릉, 낮은 천둥소리가 산 전체를 울렸다. 나는 무릎을 세워 안고 신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낡은 흙덩이일 뿐인데, 이상하게 눈이 자꾸 그리로 갔다. 금 간 눈썹 자리가 꼭 누군가를 노려보는 것처럼 보였다. 착각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돌렸다. 그때까지도 나는 몰랐다. 이 낡은 사당이 내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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