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접촉공포 소년의 위장연애

1화

거실의 조명은 여느 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강혜영은 그 아래 소파에 앉은 채 손끝으로 찻잔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김이 낮은 조명 속에서 가늘게 흩어졌다가 사라졌고, 그 반복되는 리듬이 마치 시계추처럼 정확하게 방 안의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강도윤은 계단을 내려오다 그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어머니가 이런 시간에 그를 부르는 일은 드물었고, 드문 일은 대개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는 걸 열여덟 해를 살며 배운 뒤였다. 계단 손잡이를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가 이내 풀렸다. 그는 잠시 그대로 서서 어머니의 옆얼굴을 내려다보았는데, 그 얼굴에는 아무런 예고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앉아." 짧은 명령이었다. 도윤은 소파 맞은편, 그러니까 가능한 한 먼 자리를 골라 앉으며 무릎 위에 손을 포갰고, 그 손끝이 미세하게 굳어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알아채지 못한 채 찻잔을 내려놓았다. 도자기가 유리 테이블에 닿으며 낸 짧고 맑은 소리가, 그 순간 거실을 채운 유일한 음이었다. "다음 달에 상견례가 있을 거야." 도윤은 잠시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상견례요." "결혼 상대 쪽 부모님 만나는 자리라는 뜻이야, 몰라서 묻는 거 아니잖니." 어머니의 목소리는 서늘했고, 그 서늘함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섞여 있지 않았다. 회사가 어려워졌다는 이야기, 투자자 쪽 집안과의 결합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그런 말들이 차분한 어조로 이어지는 동안 도윤은 손끝이 점점 차가워지는 걸 느꼈는데, 그건 추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 집 딸이 스물다섯이래. 유학까지 다녀왔고, 예의도 바르다더구나." 어머니는 마치 물건의 사양을 읊듯 말을 이었다. 나이, 학력, 집안, 재산 순서로 나열되는 조건들이 도윤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손등에 돋아나는 소름을, 그리고 그 소름이 조명 아래서 미세하게 빛나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언제 결혼한다고 했어요." "네가 언제 결혼 안 한다고 한 적도 없잖아." 그 대답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태연했으므로, 도윤은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어머니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 눈동자는 짙은 갈색이었고, 그 안에 아들에 대한 걱정 같은 건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 눈은 이미 결정된 사안을 통보하는 사람의 눈이었다. "엄마." "응." "저 그 사람이랑 밥도 못 먹어요." "밥이야 다들 먹는 거지. 예민하게 굴지 마." 예민하다는 말이 그의 몸에 얼마나 깊이 새겨진 흔적을 뭉개버리는지, 어머니는 알지 못했다. 알려고 한 적도 없었다. 어머니가 몸을 일으켜 다가오며 그의 셔츠 깃을 바로잡으려 손을 뻗었을 때, 도윤은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젖혔다. 손끝이 옷깃에 닿기도 전에 일어난 반응이었다. 소파 등받이가 그의 어깨를 받아냈고, 그 짧은 순간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다시 풀어졌다. "또 이러네." 어머니는 짧게 혀를 찼을 뿐,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녀에게 아들의 이 오래된 버릇은 그저 유난스러운 습관 정도로만 여겨지는 듯했다. 손을 뻗었다가 거두는 그 짧은 동작 속에 어떤 실망도, 어떤 의문도 담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도윤의 가슴 어딘가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등 뒤로 어머니의 목소리를 마저 들었다. "상대는 좋은 집안 딸이야. 너한테 나쁠 거 없어." 나쁠 거 없다는 그 말이 방문을 닫는 순간까지 귓가에 남아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고, 손끝으로 계단 난간을 짚을 때마다 나무의 결이 살갗에 걸리는 감촉이 낯설게 느껴졌다. 방 안은 어두웠다. 도윤은 불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는데, 손바닥에 닿는 제 얼굴의 온도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것도, 어깨를 스치는 것도, 손을 잡는 것도 견디기 힘든 그가, 결혼이라는 이름의 관계를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처음 보는 여자와 한 침대에 눕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언젠가 학교 상담실에서 들었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강도윤 학생, 스킨십에 이렇게까지 예민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 사실을 그때 누군가 제대로 짚어주었더라면, 지금 이 순간이 조금은 달랐을까.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도 그저 신경성이라며 넘겼을 사람이었으니까.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비스듬히 새어 들어와 방바닥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그림자의 길이가 마치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재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윤은 그 그림자의 끝을 발끝으로 지그시 눌러보았다. 아무것도 눌리지 않았다. 그저 어둠의 한 조각이었을 뿐이다. 도윤은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액정의 푸르스름한 빛이 얼굴 위로 쏟아졌고, 그 빛 속에서 그의 눈동자는 유난히 짙어 보였다. 연락처 목록을 한참 내리다가 한 이름 위에서 엄지가 멈췄다. 이서준. 2년째 알고 지낸, 유일하게 곁에 두어도 숨이 막히지 않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도윤은 그와 어깨가 스쳤는데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던 자신에게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 서준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부딪혔네. 미안."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던 자신이, 그날 밤 이불 속에서 오래도록 그 순간을 곱씹었다는 걸 서준은 모를 것이다. 그 이름을 오래 바라보던 도윤의 눈동자에 어떤 계산이 스치고 지나갔는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손끝이 화면 위에서 몇 번이나 머뭇거리다가, 결국 자음과 모음을 하나씩 두드려나갔다. 다만 그날 밤, 그는 오랜만에 먼저 문자를 보냈다. '내일 시간 돼?' 전송 버튼을 누른 뒤에도 도윤은 한동안 화면을 끄지 않은 채 그대로 들고 있었다. 방 안의 정적 속에서 휴대폰의 진동 하나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답은 금방 왔다. '너랑은 언제든.' 그 짧은 문장이 어쩐지 오늘 하루 중 가장 따뜻하게 느껴졌다는 사실을, 도윤은 애써 모른 척했다. 화면을 끄고 나서도 어둠 속에서 그 문장의 잔상이 눈앞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고, 그는 그 잔상을 지우지 않은 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내일이면, 무슨 얼굴로 서준을 마주해야 할지, 도윤은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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