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규칙 하나, 키스는 금지

3화

본부는 강남의 평범한 빌딩 지하에 있었다. 간판도 없었다. 표시도 없었다. 지상에서 보면 그냥 흔한 사무실 건물이었다. 1층엔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었고, 2층엔 세무사 사무실이 있었고, 3층부터는 뭘 하는지도 모르는 회사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어디에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표지판은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지문 인식을 세 번 거쳐야 했다. 첫 번째는 로비. 두 번째는 지하 1층 문 앞. 세 번째는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마지막 관문. 세 번 다 통과하고 나면, 그제야 진짜 사무실이 나타났다. 나는 이 절차를 삼 년째 반복하고 있었다. 지겹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다만 아침마다 손끝을 센서에 갖다 댈 때마다 손끝이 서늘해지는 감각만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딸깍. 세 번째 문이 열렸다. 한서연 실장은 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창가 자리, 커피 한 잔, 그리고 서류 더미. 지하인데 창가라니.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았다. 그건 진짜 창이 아니라, 벽면 전체에 붙은 스크린이었다. 사계절 내내 다른 풍경이 떠 있었다. 오늘은 벚꽃이었다. 흩날리는 분홍 잎들이 유리 너머로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가짜 계절 앞에서 진짜 일을 하는 여자. 그게 한서연이었다. "어제 수고했어."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수고랄 게 있나요." 나는 소파에 앉지 않고 그냥 선 채로 대답했다. 이 방에서 오래 앉아 있으면 좋을 게 없다는 걸 경험으로 배웠다. "성재 씨 서류는 확보했고?" "네." "잘했네." 그녀는 자식 자랑하듯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나는 늘 불편했다. 다정한 척하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계산이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여자가 진짜 무서운 이유는, 그 계산을 절대 티 내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한서연은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손끝이 우아했다. 손톱은 늘 무채색이었고, 반지는 낀 적이 없었다. 결혼했다는 얘기도, 안 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 없었다. 이 조직에서 사생활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암묵의 규칙이었다. "다음 건은 좀 커." 한서연이 서류철을 내밀었다. 나는 그걸 받아 펼쳤다. 오세훈. 국회의원 박래강과 얽힌 인물. 사진 속 남자는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삼십 대 초반, 안경을 쓴, 어디 대학교 강사 같은 얼굴.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위험 신호였다. 이 바닥에서 위험해 보이는 사람은 진짜 위험한 경우가 드물었다. 그리고 파일 한 귀퉁이에 붉은 글씨로 적힌 메모. [대상 남성, 이성 유혹 무효.]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처음엔 오타인 줄 알았다. "이 사람, 게이야." 한서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담담하다 못해 사무적이었다. 마치 오늘 점심 메뉴를 말하듯이. 나는 파일을 다시 읽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매번 낯설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별의별 신상 정보를 다 알게 된다. 누가 누구와 잤는지, 누가 누구에게 빚을 졌는지, 누가 누구를 협박하는지. 그런데도 매번 새로운 파일 앞에서 나는 잠깐 멈칫하는 버릇이 있었다. 사람 하나의 인생이 이렇게 종이 몇 장으로 정리된다는 게,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럼 저는 뭘 하는데요." 내가 물었다. 이성 유혹이 무효라면, 내가 이 파일을 받은 이유가 없었다. "파트너를 붙일 거야." "신입이요?" "응. 이번 기회에 손발도 좀 맞춰보고." 나는 대답 대신 파일을 덮었다. 신입과 함께 일한다는 건, 내 방식이 아니었다. 나는 늘 혼자 움직였다. 그게 안전했고, 그게 익숙했다. 누군가와 손발을 맞춘다는 건, 그 사람의 실수를 내가 떠안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바닥에서 실수는 종종 목숨값이었다. "거부권은 없죠." "없지." 한서연이 웃었다. 그 웃음이 유독 서늘하게 느껴졌다. 벽면 스크린의 벚꽃 잎이 마침 그녀의 얼굴 옆으로 흩날리며 지나갔다. 아름다운 배경과 서늘한 웃음의 부조화가 나는 매번 소름 끼쳤다. "그리고, 서은채." 그녀가 덧붙였다. "네." "이번 건 신중하게 해. 박래강 뒤에 누가 있는지, 너도 알잖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어서 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브리핑을 마치고 나오는 길, 복도에서 한 남자와 마주쳤다. 젊고, 마른 체형에, 눈매가 순한 인상이었다. 옷차림도 어딘가 어색했다. 정장 재킷은 몸에 맞지 않게 헐렁했고, 넥타이는 살짝 삐뚤어져 있었다. 이 조직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디 회사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에 잘못 온 사람처럼 보였다. "저기, 서은채 씨 맞으시죠."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누구세요." 내 목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딱딱했다. 습관이었다. "윤재민입니다. 이번에 같이 하게 됐어요." 나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눈빛에 살기가 없었다. 손도 곱상했다. 손톱 밑에 굳은살 하나 없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는지 의문이었다. 이 조직에 들어오려면 최소한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그 시험이 결코 순한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웃는 얼굴이 지나치게 선했다. 나는 그 손을 잡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저기요." 뒤에서 그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기까지의 몇 초가 유독 길게 느껴졌다. 그가 몇 걸음 뒤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기척이 등 뒤로 느껴졌다. 나는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건물을 나서니 저녁 공기가 확 끼쳤다. 지하에 있다 나오면 늘 이 온도차가 낯설었다. 세상은 여전히 평범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퇴근하는 회사원들, 편의점 앞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 배달 오토바이 소리. 나는 그 평범함 속으로 섞여 들며 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 가기도 전에 그가 받았다. "일 끝났어?" 그가 물었다. "응. 근데 이상한 일이 생겼어." "뭔데." "파트너가 생겼어. 신입인데." 전화 너머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도윤답지 않아서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괜찮은 사람이야?" "몰라. 근데 좀 이상해. 눈빛이 너무... 순해." "순한 게 왜 이상해." "이 바닥에서 순하면 못 살아남으니까." 그가 짧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넘어오는데, 나는 문득 손끝이 시렸다. 늦은 봄인데도 그랬다. "너무 경계하지 마." "경계 안 하면 죽어." 대답이 매몰찼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게 도윤의 방식이었다. 나를 밀어붙이지 않는 것. 대신 늘 곁에서 기다리는 것. 삼 년을 만나면서 그는 단 한 번도 내 일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어디서 뭘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그저 내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밥은 먹었어?" 그가 물었다. "아니. 이제 가려고." "내가 뭐 좀 만들어놨어. 와서 먹어." "뭘 만들었는데." "와보면 알아." 나는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웃은 것 같았다. "금방 갈게."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문득 아까 그 남자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윤재민. 살기 없는 눈. 그 눈이 왜 자꾸 마음에 걸리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이 바닥에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라고. 어쩌면 며칠 안에 그만두겠거니, 그렇게 가볍게 넘겼다. 그날 밤, 나는 도윤이 차려준 밥을 먹으며 별생각 없이 하루를 마무리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불빛들을 보면서, 내일은 또 어떤 서류를 뒤적여야 할지 생각했다. 오세훈이라는 이름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이성 유혹 무효라는 문구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럼 도대체 나는 이 일에서 뭘 해야 하는 걸까. 낯선 신입과, 통성명도 제대로 못 한 윤재민이라는 얼굴이 자꾸 겹쳐 떠올랐다. 설마. 아니겠지. 나는 그 생각을 애써 지웠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최악의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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