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규칙 하나, 키스는 금지

5화

그 질문 이후로 나는 며칠간 그를 피했다. 무섭냐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나는 이 바닥에서 남자를 유혹해 죽이는 사람이다.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내 사전에 없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밥을 먹을 때도, 무기를 손질할 때도, 심지어 잠들기 직전까지도 그 한마디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무섭냐고. 무서워요, 은채 씨. 그렇게 물었던 그의 눈빛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그를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동선을 바꿨다. 사무실 복도에서 그의 발소리가 들리면 방향을 틀었고, 식당에서 그가 앉은 테이블이 보이면 다른 자리를 찾았다. 유치했다. 스스로도 알았다. 하지만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뭔가 들킬 것 같았다. 오세훈 작전 마무리 단계, 두 번째 미팅 자리에서 결국 윤재민과 마주쳤다. 피할 곳이 없었다. 작전상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하는 자리였으니까. 그가 다시 그 얘기를 꺼냈다. "제가 실수했으면 죄송해요. 근데 은채 씨, 남자가 손 대려고 하면 몸이 굳어요. 저도 봤어요, 아까." "헛소리하지 마." "헛소리 아니에요." "내가 몸이 굳는다고? 무슨 근거로." "오늘 아까, 오세훈이 은채 씨 어깨에 손 올렸을 때요. 0.5초쯤 됐나. 숨도 안 쉬시던데요." 숨이 턱 막혔다. 정확했다. 그 짧은 순간을 이 남자는 놓치지 않고 봤다. "그건 그냥... 놀란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어요. 근데 자꾸 그런 순간이 있더라고요." 그의 눈빛이 진지했다. 그게 더 짜증 났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사람 속을 헤집으려 드는 걸까. "넌 그냥 네 할 일이나 해." "저는 그냥... 파트너로서 걱정돼서요." 걱정. 그 단어가 낯설게 들렸다. 이 바닥에서 누가 누구를 걱정한다는 건, 사치였다.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걱정 안 해도 돼. 작전에나 집중해."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서류를 챙기며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이 뭔가 여운을 남겼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그날 밤, 임무를 위해 오세훈의 별장으로 잠입했다. 계획은 단순했다. 윤재민이 경비를 유인하고, 내가 서재에서 자료를 확보하는 것. 담을 넘을 때부터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었다. 이유 모를 불안이었다. 손끝이 유독 차가웠다. 서재까지는 순조로웠다. 캐비닛을 열고 파일을 뒤지는 손이 익숙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경호원 중 한 명이 나를 붙잡았다. 덩치 큰 남자였다. 그가 내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의 손아귀가 팔뚝을 파고들었다. 억센 손가락이 살 속으로 파고드는 그 감촉. 그 순간, 뇌리에 오래된 장면이 스쳤다. - "가만있어. 가만있으라고 했잖아."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어릴 적, 좁은 방 안에서 나던 그 목소리. 손목을 짓누르던 손아귀의 감촉. 벽지 냄새, 형광등이 깜빡이던 소리, 그리고 문이 잠기는 딸깍 소리. 딸깍. 숨이 턱 막혔다.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시야가 흐려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팔을 뿌리쳐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신경과 근육 사이에 뭔가 끊어진 것처럼. 경호원의 손이 내 목으로 향하는 걸 보면서도, 나는 도망칠 수 없었다. 머릿속은 여전히 그 방, 그 목소리에 갇혀 있었다. 이러다 죽는구나. 그런 생각조차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때 윤재민이 뛰어들었다. 그는 경호원의 등을 뒤에서 세게 밀쳤다. 균형을 잃은 남자가 비틀거리는 사이, 윤재민이 나를 잡아끌었다. "정신 차려요!" 그 외침에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품속의 나이프를 꺼내 경호원의 옆구리를 그었다. 남자가 신음하며 무릎을 꿇었다. 윤재민이 재빨리 남은 서류를 챙겨 넣었다. 그의 손이 내 손목을 잡았다. 따뜻했다. 아까 그 손아귀와는 완전히 다른 온도였다. "뛸 수 있어요?" 대답할 새도 없이 그가 나를 끌고 뛰기 시작했다. 둘이 함께 별장을 빠져나왔다. 차 안에서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사람을 죽인 뒤에도 이렇게 떨어본 적은 없었다. 나이프를 쥔 손끝이 여전히 저릿했다. "괜찮아요?" 윤재민이 물었다. "괜찮아." 거짓말이었다. "아까 그거, 뭐였어요." "몰라도 돼." "은채 씨." "몰라도 된다고 했어."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운전만 했다. 신호에 걸릴 때마다 힐끗 나를 살피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고마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도윤에게 전화했다. 신호음이 세 번쯤 울렸을까, 그가 받자마자 목소리부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그의 목소리에서 뭔가를 눈치챈 듯했다. 나는 대답 대신 울음이 터졌다.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그의 숨소리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낮게 이어졌다. "어디야. 지금 갈게." "아냐. 괜찮아. 그냥... 목소리만 듣고 싶었어."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전화기를 든 채로 내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줬다. 그 침묵이 어떤 말보다도 나를 붙잡아 줬다. 다음 날, 한서연이 나를 불렀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어제 작전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비인가 살상." 그녀가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정당방위였어요." "과정이 어쨌든, 결과는 결과야."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경고는 명확했다. "보고서엔 네가 3초간 무방비 상태였다고 적혀 있던데. 그 3초, 뭐였어." 말문이 막혔다. "이런 식으로 감정이 통제 안 되면, 너도 나도 곤란해져." "제어하고 있어요." "안 그래 보이는데." 그녀가 펜을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윤재민이 아니었으면 넌 지금 이 자리에 없었어.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쿵. 도윤이었다. 그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규칙을 깬 것이었다. 한서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누구시죠." 도윤이 나를 잠깐 바라보고는, 시선을 한서연에게 옮겼다. 그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차갑고, 단호했다. "은채 남자친구입니다. 그리고 오늘부로, 이 여자한테 무슨 요구를 하시든 저를 통해서 하셔야 할 겁니다." 사무실 안 공기가 얼어붙었다. 한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도윤과 나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 속에 뭔가 계산이 스치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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