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벙커의 가장이 된 아들

3화

그날 이후 벙커 안의 공기는 눈에 띄게 무거워졌는데, 환기구를 타고 도는 습한 공기마저 예전과 다르게 느껴질 만큼 모두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한서연은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좀처럼 나오지 않았고, 그 문틈 아래로 새어 나오는 불빛만이 그녀가 여전히 안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뿐이었다. 이강호는 통제실에 틀어박혀 태블릿만 붙들고 있었는데, 화면을 넘기는 손가락의 속도만큼이나 표정에는 어떤 계산이 스쳐 지나가고 있어서 그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강미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주방을 오가며 삼시 세끼를 챙기는 일에만 몰두했는데, 그 지나친 평온함이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준서는 그 모든 어긋난 온도차 속에서 이수아만이 유일하게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고 있었는데, 정작 이수아 역시 며칠째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 있었다. 식사 시간에도 묻는 말에만 짧게 대답할 뿐, 예전처럼 조잘거리며 오빠를 따라다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괜찮아?" 이준서가 물었을 때, 이수아는 창고 구석에 쭈그려 앉아 통조림 재고를 세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손에 든 볼펜 끝으로 종이를 톡톡 두드리는 소리만 좁은 창고 안을 울렸다. "그냥, 여기 있는 게 다 무서워."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밖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이상해졌어." 이준서는 잠시 그녀 옆에 앉아 함께 재고를 세는 척하다가, 통조림 캔의 차가운 표면이 손끝에 닿는 감촉을 느끼며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몫으로 배급된 초콜릿바 하나를 슬쩍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거, 아까 배급받은 건데 너 줄게." 대수롭지 않은 척 던진 말이었지만, 손끝이 그녀의 무릎을 스치는 순간 어쩐지 목이 메었다. 이수아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왈칵 차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몇 번이나 훔쳐내도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고,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왜 울어." 이준서가 당황해 물었을 때, 이수아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했지만, 사실 그녀를 울린 것은 초콜릿바가 아니라 그것을 건네는 오빠의 손끝이었다. 세상이 무너진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을 조건 없이 신경 써주고 있다는 감각, 그 사소함이 오히려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을 터뜨리는 방아쇠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다들 나한테 괜찮냐고만 묻고, 정작 진짜로 괜찮은지는 아무도 안 물어봐. 근데 오빠는… 그냥, 이거 하나 준 것뿐인데." 말끝이 흐려지며 다시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이준서는 그녀의 등을 가만히 토닥이다가, 문득 자신의 손바닥에 닿는 동생의 체온이 필요 이상으로 오래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슬며시 손을 거두었다. 등을 토닥이던 손이 멈추자 이수아가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에 담긴 의존과 신뢰가 왠지 모르게 이준서의 가슴 한구석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 무렵 강미래는 주방에서 배급 명단을 정리하며 이준서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볼펜 끝으로 명단 위 숫자를 짚어가던 손이 문득 멈추더니, 고개를 들어 이준서 쪽을 향했다. "너, 통제실 콘솔 다룰 줄 알아?" 갑작스러운 물음에 이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강미래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짧게 웃었다. "다행이네. 강호 씨가 요즘 그거 볼 정신이 없어서." 그 말속에 담긴 친밀함의 온도가 이준서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저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도, 억양 사이에 스며든 익숙함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버지를 강호 씨라고 부르는 이 여자는 대체 누구인가. 정말 그저 물류 담당자일 뿐인가. 이준서는 그 물음을 목 안쪽에 삼킨 채, 애써 태연한 얼굴로 명단을 받아 들었다. "네, 배운 적 있어요." "그래, 그럼 나중에 강호 씨 대신 좀 봐줘." 강미래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명단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 무심한 옆얼굴에서 이준서는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날 오후, 이준서는 일상 루틴을 복원해보자는 어머니의 제안으로 온 가족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려 했지만, 이강호가 통제실에서 나오지 않아 계획은 무산되었다. 한서연은 굳게 닫힌 문 앞에 서서 몇 번이나 노크를 하다가, 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다시 풀기를 반복했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섰는데, 그 뒷모습이 유난히 작아 보여서 이준서는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감쌌다. "엄마, 오늘은 우리끼리 먹어요." 한서연은 잠시 아들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가만히 서 있다가, 이내 옅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접촉이 남긴 온기가 유난히 오래 남았다. 저녁 식탁에서 이준서는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물잔을 채워주고, 반찬을 덜어주며 평범한 대화를 이어갔는데, 그 다정함이 며칠 만에 처음으로 벙커 안에 잠깐이나마 온기를 되돌려 놓는 듯했다. 이수아도 그 옆에서 조금씩 표정이 풀리며 숟가락을 든 채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기도 했고, 한서연은 그런 딸의 모습에 옅게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식탁 위 조명 아래서 세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겹쳐지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무너지기 전 평범했던 저녁 식사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식사가 끝나갈 무렵, 한서연이 문득 아들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너, 아빠 닮았어. 그 사람 젊었을 때랑 똑같아." 숟가락을 든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춰 있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의 눈빛에 스친 것은 그리움인지 두려움인지 구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었고, 이준서는 그 눈빛의 정체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한 소름을 느꼈다. 어머니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 위 어딘가, 이준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낯선 흔적을 더듬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엄마?" 이준서가 되물었지만, 한서연은 그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방금 전의 온기를 순식간에 밀어내고, 식탁 위에는 다시 서늘한 정적만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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