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벙커의 가장이 된 아들

4화

다음 날 아침, 통제실 앞 복도에는 아직 밤새 식은 공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형광등 하나가 지지직 소리를 내며 깜빡거리는 아래에서, 강미래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이준서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는 낡은 태블릿이 들려 있었는데, 화면에는 벙커 전체 시스템 목록이 빼곡히 나열되어 있었다. "오늘부터 환기 시스템 점검이랑 수질 여과 상태 확인은 네가 맡아." 이준서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강미래는 태블릿을 그의 가슴팍에 툭 밀어 넣으며 말했다. "강호 씨는 요즘 그런 거 신경 쓸 여력이 없어." 이준서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자, 강미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무심한 몸짓 뒤에 숨은 피로가 그녀의 눈가에 옅게 번져 있다는 것을, 이준서는 놓치지 않았다. "네가 유일하게 그 콘솔 권한 가진 사람이잖아. 이제 여기 실질적인 관리자는 너야." "관리자라니, 거창하네." 이준서가 태블릿을 받아 들며 낮게 대꾸했다. "책임만 떠넘기는 거 아니고?" "떠넘기는 거 맞아." 강미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인정했다. "근데 너 말고 누가 하겠어. 강호 씨는 방에서 안 나오고, 나는 애초에 이런 거 체질에 안 맞고." 그 말이 실은 공식적인 임명이라기보다 책임의 떠넘김에 가깝다는 것을 이준서도 모르지 않았지만, 딱히 거부할 명분도 없었다. 태블릿 화면 속 시스템 목록을 훑어 내리던 그의 손끝이, 생활동이라는 항목에서 잠시 멈췄다. 문제는 시스템 점검 작업 대부분이 한서연이 관리하는 생활동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배관과 여과 장치, 환기구 대부분이 그녀가 관리하는 구역 안에 몰려 있었고, 그 결과 이준서와 한서연이 하루에도 몇 번씩 좁은 배관실이나 저장고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여기 밸브 좀 봐줄래." 한서연이 부르면 이준서가 공구함을 챙겨 달려갔고, 좁은 통로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 녹슨 배관을 살피는 시간이 하루 이틀 쌓여갔다. 손전등 불빛이 벽을 타고 흔들리는 좁은 공간 안에서, 두 사람의 무릎이 부딪히고 어깨가 스치는 일이 잦아지면서, 그 거리는 조금씩 예전의 모자 관계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렇게 계속 우리끼리만 있어도 되나." 어느 날 좁은 저장고 안에서 배관 밸브를 조이던 이준서가 문득 중얼거렸다. 스패너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나사를 돌리는데, 녹슨 쇠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좁은 공간을 채웠다. 한서연은 손전등을 들어 아들의 얼굴을 비추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 끝이 살짝 떨리는 것을, 이준서는 손전등 불빛의 각도 때문이라고 애써 생각하려 했다. "그러게. 강호 씨는 며칠째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미래 씨는 애초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고."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손전등 불빛을 배관 쪽으로 돌렸다. "결국 이 벙커 돌아가게 하는 건 너랑 나네." 그 말투에 서린 것이 체념인지 안도인지, 이준서로서는 쉽게 짚어낼 수 없었다. 다만 어머니의 목소리 끝에 남은 여운이,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공기 중에 머물러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은 하루 대부분의 노동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고, 좁은 통로와 어두운 저장고를 오가며 나누는 대화는 점점 사적인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밸브의 위치나 여과망 교체 주기 같은 실무적인 이야기뿐이었지만, 시간이 쌓이면서 한서연은 조금씩 예전에는 드러내지 않던 말들을 흘리기 시작했다. "네 아빠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어." 배관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를 배경 삼아, 한서연이 불쑥 말을 꺼냈다. "결혼했을 때만 해도 나한테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남자였는데." 이준서는 손을 멈추고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스패너를 쥔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다정했다고?" 그가 되물었다. 지금의 강호에게서는 상상하기 힘든 단어였다. 한서연은 시선을 손전등 불빛 너머 어딘가에 둔 채 말을 이었다. "산에서 떨어졌던 그날부터 다 달라졌어. 네가 두 살 때였지."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낮아졌다. "그날 이후로 그 사람은……." 거기서 말이 끊겼다. 손전등 불빛이 흔들리며 벽을 타고 스쳐 지나갔고, 저장고 안의 정적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이준서는 어머니가 말끝을 흐린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굳이 캐묻지 않았는데, 그 대신 손을 뻗어 어머니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순간 한서연의 몸이 움찔했다가, 이내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은 채 아들 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어깨 너머로 전해지는 온기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아서, 이준서는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좁은 저장고 안, 흐릿한 손전등 불빛 아래 두 사람의 어깨가 맞닿은 그 짧은 시간 동안 흐른 정적은 모자 사이라기엔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배관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만이 그 침묵을 채웠고, 어디선가 뚝, 뚝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순간 저장고 문이 벌컥 열리며 강미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녁 배급 시간이야. 둘 다 여기서 뭐 해?" 그 목소리에 두 사람은 화들짝 몸을 떼며 서로에게서 물러났다. 강미래는 별다른 의심 없이 등을 돌려 앞장서 걸었지만, 이준서는 방금 자신들이 나눈 그 짧은 접촉이 결코 우연한 것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손끝에 남은 미세한 떨림을 통해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다. 그날 밤, 그는 침대에 누워서도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눈동자 위로 형광등 불빛의 잔상이 어른거렸고, 옆방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소음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어머니가 하다 만 그 문장의 뒷부분을 계속해서 곱씹으며, 그는 몇 번이고 몸을 뒤척였다. '그날 이후로 그 사람은.' 그 다음에 이어졌을 말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할 것 같은 조바심이 가슴 한구석에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두 살 때의 기억 따위 남아 있을 리 없는데도, 그 문장이 자꾸만 목덜미를 잡아 흔드는 느낌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는 거지. 이준서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어깨에 남은 온기의 잔상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채였다. 어둠 속에서 그는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며, 내일 다시 그 좁은 저장고에서 어머니와 마주 앉게 될 순간을 이미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애써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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