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중개인님, 저 살 수 있는 거죠?

2화

다음 날 아침, 다래는 나를 데리고 도시 외곽의 낮은 건물로 향했다. 날씨는 흐렸다. 하늘에는 두꺼운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그 사이로 간간이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걷는 동안 다래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앞장서서 걸었고, 나는 그 뒷모습을 따라가며 도시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건물은 3층짜리 낡은 상가였다. 간판에는 "새터전공인중개법인"이라고 적혀 있었고, 글씨는 오래되어 색이 반쯤 벗겨져 있었다. 문을 열자 종이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냄새는 어딘가 익숙했다. (예전에… 아버지 사무실에서 나던 냄새랑 비슷한데) "어서 오세요." 안쪽에서 나온 사람은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짧게 자른 흰머리, 낮게 눌러 쓴 안경, 단정한 셔츠 차림이었다. 셔츠의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려져 있었고, 그 아래로 굵은 힘줄이 드러난 팔뚝이 보였다. "이쪽이 박정호 대표님이세요." 다래가 소개하자 정호는 나를 훑어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 시선은 짧았지만 꼼꼼했다. 마치 물건을 감정하듯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는 눈길이었다. "박정홉니다." 악수는 짧고 단단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느껴졌다. (사람이… 뭔가 산전수전 다 겪은 느낌이네) 정호는 다래를 향해 잠깐 시선을 던졌는데, 그 눈빛이 이상하게 날카로웠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방금 그거… 나 때문인가, 아니면 다래 씨 때문인가) "이번에도 그쪽 회사에서 보내신 거죠." "네, 맞아요." "…알겠습니다. 서류는 준비됐고요." 정호가 책상 위에 서류 뭉치를 펼쳤다. 주민등록증처럼 보이는 카드, 계약서, 그리고 아파트 도면이 놓여 있었다. 도면 위에는 붉은 색으로 표시된 구획이 하나 있었다. 나는 그게 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선율타워라는 곳입니다. 33층에 방이 하나 비어 있어요." "선율타워요." 이름을 되뇌자 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급 주거지역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곳입니다. 관리도 잘 되고, 안전 시스템도 갖춰져 있어요." 정호는 서류를 넘기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말투에는 어딘가 훈련된 듯한 절제가 배어 있었다. 그런데 말을 하는 중간중간 시선이 다래를 향했다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이 사람… 다래 씨를 뭔가 불편해하는 것 같은데) 책상 위의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사무실 안은 조용했고,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은 흐릿한 회색빛이었다. "참고로." 정호가 목소리를 낮췄다. "저는 그쪽 회사와 오래 거래를 해왔습니다만, 매번 이렇게 갑자기 사람을 데려오는 건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다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미소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눈빛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걱정 마세요. 이번 분은 문제없을 거예요." "…그러길 바랍니다." 정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긴장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 대화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이 계약 뒤에 내가 모르는 규칙이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들 나한테 말 안 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정호는 잠시 안경을 고쳐 쓰고는 다시 서류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 손끝이 종이를 넘길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서류 작성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호는 신원 카드에 내 사진을 붙이고, 이름과 생년월일을 확인했다. "강태민, 19세." 정호가 소리 내어 읽자 그 이름이 낯설게 울렸다. 분명 내 이름이었는데도 어딘가 다른 사람의 것 같았다. (강태민… 나는 정말 이 이름의 주인인가) "자, 여기 서명하시면 됩니다." 나는 펜을 쥐고 서명을 했다. 손이 조금 떨렸다. 펜 끝이 종이에 닿는 순간, 잉크가 스며드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이제부터… 진짜 여기서 살아야 하는 건가) 서명을 마치자 정호는 서류를 정리해 서랍에 넣었다. 그 동작이 오랜 세월 반복된 습관처럼 자연스러웠다. 계약이 끝나고 정호는 나에게 열쇠를 건넸다. 열쇠는 차가웠고, 표면에는 작은 숫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33층, 3302호입니다. 이미 세 분이 함께 살고 계시는데, 방 하나가 남아서 그쪽으로 배정됐습니다." "…같이 사는 건가요." "셰어형 주거예요. 요즘은 흔한 형태입니다." 정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딘가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짧게 스쳤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다만 그 세 분이… 좀 개성이 강하신 편이라 미리 말씀드립니다." (개성이 강하다는 게 무슨 뜻이지) 나는 궁금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런 걸 물을 여유가 없었다. 머릿속에는 이미 너무 많은 물음표가 쌓여 있었고, 하나를 더 얹는다고 해서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정호는 마지막으로 나를 한번 더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동정인지, 경계인지, 아니면 그저 오랜 습관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계약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다래가 나를 바라봤다. "당장 오늘 들어가실 필요는 없어요. 며칠 도시에 익숙해지시고 천천히 들어가셔도 돼요." "…그럼 오늘은 좀 걸어보고 싶어요." "좋아요.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울게요. 필요하시면 이걸로 연락하세요." 다래가 작은 카드 형태의 기기를 건넸다. 표면이 서늘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매끄러웠고, 어딘가 낯선 재질처럼 느껴졌다. "이걸로 연락하면… 바로 오시는 건가요." "네. 언제든지요." 다래는 그렇게 말하고는 짧게 목례를 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았다. 다래가 사라진 뒤 나는 혼자 거리를 걸었다. 도시는 낮에도 사람이 많지 않았고, 공기 중에는 여전히 그 쇳내 비슷한 냄새가 옅게 남아 있었다. (이 냄새… 어제도 났었는데) 거리에는 낮은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고, 간판들은 대부분 색이 바랬거나 일부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발길이 이끄는 대로 골목을 하나씩 지나갔다. 어느 골목은 좁고 어두웠고, 또 어느 골목은 낮은 담벼락 사이로 볕이 스며들어 그나마 온기가 느껴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옷깃이 흔들렸고, 그 사이로 도시 특유의 텁텁한 공기가 스쳤다. 골목을 지나던 중, 어느 담벼락 아래에서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검붉은 얼룩이 벽을 타고 흘러내린 자국이었다. 얼룩은 마른 지 오래된 듯 색이 짙게 굳어 있었고, 그 형태가 사람의 손자국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위로 그림자 하나가 짙게 덮여 있었는데, 사람의 것이라기엔 형태가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저게… 뭐지) 나는 걸음을 멈췄다. 숨을 죽이고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림자의 윤곽은 사람처럼 두 개의 다리와 팔이 있는 듯했지만, 머리 부분이 이상하게 길게 늘어져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그 위에 얹혀 있는 것처럼. 바람이 불자 나뭇잎이 사각거렸고, 그 소리 사이로 뭔가 삐걱거리는 듯한 낯선 파문이 섞여 들었다.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움직이지 마… 일단 가만히) 그림자는 잠깐 흔들리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탁. 작은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담벼락은 그저 낡은 벽일 뿐이었고, 얼룩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림자는 자취를 감췄다. 나는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그거… 내가 헛본 게 아니겠지)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지만, 골목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골목은 다시 조용해졌지만, 그 정적이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어디선가 낮게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바람 소리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걸음을 옮기려다 다시 한번 담벼락을 돌아보았다. 얼룩은 그대로였다. 그림자는 없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분명 방금 전까지 무언가가 있었다는 감각이 남아 있었다. 나는 서둘러 그 골목을 벗어났다. 등 뒤로 여전히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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