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완벽한 공주의 결핍

1화

궁을 나온 지 석 달째였다. 산자락 아래 낡은 목조 오두막, 창틀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냄새가 흙과 곰팡이 섞인 냄새로 바뀐 지도 오래였다. 나는 그 냄새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궁에서는 향낭을 태운 침소에서 잠들었다. 비단 이불 밑에서, 시녀 셋이 교대로 지키는 밤을 보냈다. 이제는 낡은 담요 한 장과 삐걱거리는 나무 침상뿐이었는데도, 이상하게 그쪽이 더 편했다. '공주였던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사람은 자기가 잃은 것의 크기를 재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날 아침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마당에서 빨래를 헹구고 있었고, 도윤은 마을에 내려가 소금과 밀가루를 사 오겠다며 아침 일찍 나섰다.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돌아오지 않아서, 나는 그가 또 노파의 좌판 앞에서 흥정을 하다가 시간을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식을 가져온 건 마을 초입에서 약초를 팔던 노파였다. 정확히는, 그 노파의 말을 도윤이 얻어들은 것이었다. 그는 오두막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며 숨도 고르지 않고 쏟아냈다. 손에 든 소금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지도 않은 채였다. "이서린, 들었어? 왕실에서... 공표를 했대." "무슨 공표." "당신 계승 자격을 박탈했대. 이제 당신은... 공주가 아니야." 그는 말을 마치고서야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나무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릇이 탁자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럴 줄 알았다.' 예언된 혼인을 거부하고 도망친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여신의 축복을 받은 영웅과의 결혼을 파기하고 평민과 사랑을 택한 공주라니, 왕실이 나를 그대로 둘 리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아무 공표도 없었다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실제로 그 말을 듣는 순간, 배 속 어딘가가 서늘하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으로 백 번쯤 시뮬레이션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낯설게 들릴까. "괜찮아?" 도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괜찮아." 나는 즉답했다. 도윤은 뭔가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내가 단호하게 끊어내면, 그는 그 이상을 파고들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의 손이 내 어깨 쪽으로 향하다가 도로 거둬졌다. 나는 그 어색한 손짓을 못 본 척했다. '이상하다.' 계승 자격 박탈은 예상했던 결과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에 걸리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노파가 굳이 이 산골짜기까지 그 소식을 물어 나를 만큼, 이 일이 그렇게까지 빠르게 퍼졌다는 사실. 왕실이 나를 완전히 버렸다면, 이렇게까지 시끄럽게 떠들 필요가 없었다. 버림받은 자는 조용히 잊히는 법이다. 왕실 문서 어딘가에 이름을 지우고, 초상화를 태우고, 그걸로 끝이었어야 했다. 그런데 이건 잊히는 방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온 나라가 알도록 알리는 방식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크게 떠드는 거지.' 도윤은 화롯불 앞에 앉아 마른 장작을 몇 개 더 던져 넣었다. 불꽃이 튀며 그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는 아까부터 계속 소금 자루의 매듭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풀지도 않고, 그저 손끝으로 매듭의 모양을 문지르는 버릇이었다. 그는 마신전쟁 때 최준혁의 파티에 속해 있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흘려들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사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최준혁. 여신의 축복을 받은 영웅. 내가 파혼한 그 사람. "도윤, 당신은 왜 그 파티를 나온 거야." "...예전에 말했잖아. 그냥, 안 맞아서." "안 맞아서, 라니." "음, 그, 그러니까...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야." 그는 말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매듭을 만지던 손이 이번엔 자루째로 옆으로 밀어냈다. 대화를 끝내고 싶다는 뜻이었다.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아직은 캐물을 때가 아니라는 직감이 있었다. 캐물어봐야, 저 표정으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창밖에서 늦은 바람이 불었다. 오두막 벽이 낮게 삐걱거렸다. 화롯불이 흔들리며 그림자가 벽을 타고 길게 늘어졌다. '계승 자격 박탈. 그리고 이 시끄러운 소문.'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뭔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도윤의 숨소리가 옆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왔지만, 나는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며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왕실이 나를 버렸다고 공표했다는 건, 더는 나를 보호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동시에, 더는 나를 숨겨줄 이유도 없다는 뜻이었다. 계승권을 가진 자였을 때는, 내가 도망쳤다는 사실 자체가 왕실의 수치였다. 그래서 조용히 덮어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공표를 한다는 건, 오히려 나를 찾아야 할 이유가 새로 생겼다는 뜻이 아닐까. 그런데도 소문이 이렇게 크게 도는 이유는 뭘까. 단순한 폐위 공표라면 이렇게까지 산골짜기 노파의 입에까지 오르내릴 필요가 없었다. 이건 누군가 의도적으로 퍼뜨린 소문에 더 가까웠다. 나는 몸을 뒤척였다. 도윤이 잠결에 팔을 뻗어 나를 끌어당겼다. 그 온기에 잠시 생각이 흐트러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답은 다음 날 아침, 마을 어귀에서 들려온 또 다른 소식으로 드러났다. 나는 직접 마을로 내려갔다. 도윤이 말렸지만, 앉아서 소문의 파편만 주워듣는 것보다는 직접 들어보는 게 나았다. 마을 어귀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방금 관도 쪽에서 올라왔다는 행상이 숨을 몰아쉬며 뭔가를 떠들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마을 사람들이 반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추격대가 꾸려졌대! 이번엔 진짜래!" 행상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추격대가 꾸려졌다는 소식이었다. 그것도, 아주 특별한 사람이 그 선두에 섰다는 소식과 함께. 나는 사람들 틈에서 걸음을 멈췄다. '특별한 사람이라니.' 행상의 다음 말을 듣기 위해, 나는 무리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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