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추격대의 선두에 선 사람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물동이를 놓칠 뻔했다.
최준혁.
마신 토벌의 주역, 여신의 축복을 받은 자, 그리고 나와 혼인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사람.
물동이의 물이 절반쯤 쏟아져 내 발등을 적셨다.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오히려 나를 정신 들게 했다.
'왜 하필 그 사람이.'
왕실이 자격을 박탈했다면, 이제 나는 그 누구의 혼인 상대도 아니었다. 파혼이 선포된 순간부터, 나는 최준혁과 아무 관계도 아닌 사람이 되었어야 했다. 그런데도 최준혁이 직접 추격대를 이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명예도 있고, 지위도 있고, 여신의 축복까지 받은 사람이 왜 도망친 파혼녀 하나를 잡으러 국경 근처 촌구석까지 온단 말인가.
"확실한 정보야?" 나는 노파에게 재차 물었다.
노파는 대답 대신 마당 한쪽에 쌓인 장작더미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에 동정과 경계가 반쯤씩 섞여 있었다.
"확실해. 정찰병들이 마을을 몇 개 지나갔다고 하더라고. 다들 그 이름을 입에 올렸어. 마신 토벌자가 온다고,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니까."
"몇 명이나 되는데?"
"정확히는 몰라도, 스무 명은 넘는다더라. 다들 정예병이라고 하고."
스무 명. 정예병. 그리고 그 선두에 최준혁.
혼자 도망 다니는 두 사람을 잡기엔 지나치게 과한 규모였다.
도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은 늘 나를 감싸던 손이었다. 떨림을 감추려는 듯 그가 손을 허리 뒤로 숨겼지만, 나는 이미 보았다.
"괜찮아?" 이번엔 내가 물었다.
"괜찮아." 그가 짧게 대답했다.
나는 그 대답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가 짧게 대답할 때는, 대부분 진짜 감정을 숨기고 있을 때였다. 석 달을 함께 도망 다니며 배운 게 있다면, 도윤의 짧은 대답 뒤에는 늘 긴 침묵이 따라온다는 것이었다.
노파가 자리를 뜨자 우리 둘만 마당에 남았다.
'그와 나, 처지가 완전히 바뀌었다.'
석 달 전까지 나는 왕실의 보호를 받는 공주였고, 도윤은 신분도 없는 평민이었다. 도망친 순간부터 나는 도윤에게 의지했고, 그는 나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때는 내가 그의 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왕실은 나를 버렸고, 대신 흠결 없는 영웅이 나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영웅은 다름 아닌 도윤이 예전에 속해 있던 파티의 대장이었다.
권력의 저울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도윤은 한때 최준혁의 부하였고, 최준혁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고, 최준혁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은 그 대장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가 도망자에서 사냥감으로 바뀐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사냥감이었던 걸까.'
생각할수록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었다. 나는 물동이를 다시 채우러 우물가로 걸어가면서도 그 질문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그날 낮, 도윤은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밭일을 도와주고 받은 감자 몇 알을 삶아 먹는 동안에도, 그는 창밖을 몇 번이나 내다보았다. 마치 지금이라도 문 앞에 병사들이 서 있을 것처럼.
"뭘 그렇게 봐." 내가 물었다.
"아니, 그냥." 그가 시선을 돌렸다.
'그냥이 아니겠지.'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캐물어봐야 그는 또 짧게 끊어낼 것이었다.
그날 밤, 도윤은 오두막 뒤편 처마 밑에 나가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나는 창문 틈으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무릎 위에 팔을 얹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어깨가 이따금 들썩였는데, 우는 건지 그냥 한숨을 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지켜보다가, 나는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나는 그냥 문을 열고 나가 그 옆에 앉았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도윤은 내가 앉는 걸 눈치챘으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최준혁이 무서워?" 내가 먼저 물었다.
"...아니." 그는 즉답했다.
"그럼 뭐가 문젠데."
도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손가락으로 흙바닥을 무의미하게 긁적이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음, 그, 그러니까... 그 사람이 오면, 당신은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도 있잖아."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파혼당한 공주가 돌아갈 자리 같은 게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도윤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내가 '원래는 공주였던 사람'으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돌아가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해?"
"모르겠어. 왕실 자격은 박탈됐어도, 그 사람이랑 결혼하면 공주 자리는 다시 얻을 수도 있으니까. 최준혁이라면... 왕실도 다시 받아줄 거야. 그 사람 말이라면."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안 돌아가."
나는 짧게 끊어냈다.
도윤은 그 말에도 안심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더 불안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내가 그렇게 말해도 결국은 떠날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왜 그런 얼굴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이 사람은 내가 떠날까 봐 두려운 거구나.'
그 두려움이 그의 다른 문제들─밤마다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자책, 최준혁에 대한 알 수 없는 증오─과 뒤섞여 있다는 걸, 나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가 밤마다 내 앞에서 조심스러워하는 것도, 최준혁의 이름만 나오면 유난히 얼굴이 굳어지는 것도, 결국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신이 나에게 충분하지 않다는 두려움.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잠깐 놀란 눈으로 나를 보다가, 이내 손을 마주 잡았다. 그 손은 여전히 조금 떨리고 있었다.
"도윤아."
"...응."
"난 어디도 안 가."
그 말에 도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뒤섞인 감정을 하나씩 풀어낼 시간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마을 초입에 낯선 문양의 깃발을 든 병사들 몇이 스쳐 지나갔다는 소식이 또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노파는 아침 일찍 우리 오두막 문을 두드리며, 다급한 얼굴로 그 소식을 전했다.
"저 위쪽 마을에서 봤다는 사람이 있어. 깃발 문양이 왕실 근위대 거였대."
근위대. 그것도 최준혁이 직접 이끄는 부대라면, 그저 지나가는 정찰이 아니었다.
도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추격대의 그림자가 이미 우리 가까이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