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월세 고지서와 통장 잔액을 나란히 놓고 보는 밤이면, 나는 숨을 오래 참는 사람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숫자를 몇 번이나 다시 세어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국가장학금은 등록금을 겨우 메꿔주었지만 생활비까지는 손이 닿지 않았고, 지방에서 올라온 나에게 서울의 물가는 매달 새로운 방식으로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반지하 방의 창문을 두드리는 겨울바람 소리마저 마치 빚쟁이의 발소리처럼 들리던 날들이었다.
편의점 알바로는 시급이 뻔했고, 과외는 구하기가 어려웠으며, 그나마 들어온 몇 안 되는 자리도 이미 여자 대학생들에게 다 밀려나 있었다. 학원 데스크에 이력서를 넣어봐도, 카페 아르바이트 공고에 지원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죄송한데 저희는 여학생분으로 뽑으려고요." 처음 몇 번은 그저 운이 없다고 여겼지만, 열 번이 넘어가자 나는 그것이 운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이 도시에서는 무엇을 하든 여자가 먼저였고, 나 같은 남자는 그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가야 했다.
그날 밤 우연히 눌러본 광고 하나가 내 생활을 통째로 바꿔놓을 줄은 몰랐다. 유튜브 영상 하단에 붙어 있던, 클릭을 유도하기엔 지나치게 촌스러운 배너였다. '다정 컴패니언—당신의 완벽한 남자친구를 대여하세요.' 화면 속 남자들은 하나같이 단정한 셔츠를 입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고, 시급은 내가 지금까지 벌던 어떤 알바보다도 높았다. 시간당 오만 원.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숫자는 그대로였다.
나는 몇 번이나 손가락을 화면 위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등록 버튼을 눌렀다. 이건 그냥 시급 좋은 알바일 뿐이라고,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프로필 사진을 올릴 때는 손이 떨렸고, 신체 정보와 취향을 적는 란에서는 몇 번이나 지웠다가 다시 썼다. 그래도 통장 잔액을 떠올리면 망설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등록은 쉬웠지만 그 뒤로 벌어진 일은 쉽지 않았다. 프로필이 올라간 지 이틀 만에 의뢰가 세 건이나 들어왔는데, 나는 그것들을 전부 거절했다.
첫 번째는 마흔 넘은 여성이 보낸 '하룻밤 동거 체험'이었다. 메시지에는 나이보다 사진이 훨씬 많이 첨부되어 있었고, 나는 그 사진들을 채 다 넘겨보기도 전에 화면을 꺼버렸다. 두 번째는 익명의 발신인이 보낸 것치고는 요구사항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 옷차림부터 만날 장소, 대화 주제까지 문서 한 장 분량으로 정리되어 있었는데, 그 세세함이 오히려 소름을 돋게 했다. 세 번째는 그냥 무서웠다. 프로필 사진도, 소개도 없이 오직 "돈은 문제없습니다"라는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상대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고, 그 짐작하지 못함이 곧 두려움으로 변했다. 스무 살이 되도록 여자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남자가 대체 무슨 낯으로 렌탈 남자친구 노릇을 한단 말인가.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는 남자가 렌탈 남자친구라니.
그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통장 잔액은 웃어넘길 수 없는 숫자였고, 나는 이번 주에도 매니저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아야 했다.
"도윤 씨, 이렇게 계속 다 거절하시면 저희도 곤란해요." 매니저 박서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아래에는 명백한 압박이 깔려 있었다. "프로필 등록만 하고 실적이 없으면 심사에서 밀려나요. 알고 계시죠?"
"알고 있습니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런데 저는, 연애 경험이 전혀 없어서요. 상대분이 뭘 기대하시는지 짐작이 안 가서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녀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손님들은 오히려 그런 순수한 이미지를 더 좋아하세요. 도윤 씨 같은 타입은 원래 드물어요."
그 말이 위로인지 조롱인지 나는 판단할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 동안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창밖에는 눈발이 성기게 흩날리고 있었고, 나는 이불 속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생각했다. 이 일을, 정말 계속해도 되는 걸까.
서울대학교 정문 근처 카페에서 박서연과 마주 앉은 건 그 통화 이후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카페 안은 시험 기간이 끝나가는 학생들로 붐볐고, 창가 자리에는 겨울 오후의 햇살이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였는데, 정장을 입고도 어딘지 나른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고, 나를 마주 보는 눈빛에는 계산과 호의가 반씩 섞여 있었다. 그녀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서류를 내 앞에 밀어놓았다.
"이번엔 진짜 좋은 의뢰가 왔어요. 은행원분이신데, 성격도 진지하고 별다른 요구사항도 없으세요. 데이트 코스 한 번, 세 시간이면 끝나요."
나는 서류를 훑어보았다. 이름은 가려져 있었지만 나이와 직업, 취향 몇 가지가 적혀 있었다. 스물일곱, 은행원, 재테크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함. 선호하는 데이트 장소는 미술관과 조용한 레스토랑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붉은 글씨로 '신체 접촉 없음'이라는 문구가 강조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저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물었다.
"당연하죠. 도윤 씨는 얼굴만으로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 사람이니까."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서류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클래식 음악이라니. 나는 클래식이라고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 몇 곡밖에 아는 게 없었다. 세 시간짜리 데이트를 무슨 대화로 채워야 할지, 벌써부터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가는 느낌이었다.
"긴장하지 마세요." 박서연이 내 표정을 읽었는지 덧붙였다. "손님분도 처음이시니까요. 서로 어색한 건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첫 의뢰가 확정된 순간, 나는 안도와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안도, 그리고 내가 이 일을 정말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 두 감정은 서로 상쇄되지 않은 채 가슴 한복판에서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서류를 정리하며 박서연이 문득 목소리를 낮췄다. "참, 이건 그냥 참고로 말씀드리는 건데요."
"뭔데요?"
"저희 쪽에 몇 달 전부터 계속 연락이 오는 손님이 한 분 계세요. 이름도, 나이도 밝히지 않고 가명만 쓰시는데, 제시하는 금액이 저희 최고가 의뢰보다도 세 배는 높아요."
나는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세 배요?"
"네. 그런데 아무도 안 맡겠다고 해요." 박서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커피잔을 만지는 그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멈춰 있었다. "그분, 예전에 '적포 테러'라고 들어보셨어요?"
적포 테러.
나는 그 이름을 들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뉴스에서 몇 번 스쳐 지나간 사건이었다. 정확한 전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떤 여성 하나가 관련된 조직을 상대로 벌였다는 그 사건은 몇 년 동안 도시전설처럼 떠돌았다. 누군가는 그것을 복수라 불렀고, 누군가는 광기라 불렀다. 확실한 건 그 사건 이후로 관련된 사람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그게, 그분과 관련이 있다는 거예요?" 내가 물었다.
박서연은 대답 대신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저도 확실히는 몰라요. 다만 그분 프로필에 붙은 코드네임이 그거랑 같다는 것만 알아요." 그녀가 잠시 멈추었다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차은서. 기억해두세요, 도윤 씨. 언젠가 저희가 도윤 씨한테 그분 의뢰를 넘길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요."
"왜 저한테요?" 나는 되물었다. "다른 분들도 많으신데."
"그러니까요." 박서연이 낮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어딘가 씁쓸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그분이 원하는 조건이 좀 특이해서요. 연애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 그게 유일한 조건이에요."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 조건이 정확히 나를 가리키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 이름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차은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도 왜 이렇게 낯설지 않게 들리는 걸까. 그 순간, 카페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검은 세단 한 대가 유난히 오래 시야에 머물렀다. 창에 반사된 겨울 햇살 때문에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그 세단은 마치 나를 지켜보다가 천천히 멀어지는 것처럼, 신호도 없는 도로 위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