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나, 렌탈남친이 되었다?!

2화

이유진과 만나기로 한 날짜가 다가오자, 나는 매일 밤 데이트 예절이라고 검색되는 모든 글을 읽어보았다. 어떤 글은 눈을 마주치라 했고, 어떤 글은 너무 오래 눈을 마주치지 말라 했으며, 또 다른 글은 상대의 말을 먼저 들어야 한다고 했다. 정보는 넘쳐났지만 그중 어느 것도 확신을 주지는 못했고, 오히려 그 정보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 머릿속을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연애를 안 해본 게 이렇게까지 문제가 될 일인가. 스무 살이 다 되도록 나는 여학생과 손을 잡아본 적조차 없었다. 지방에서는 남학생이 먼저 다가가는 게 흔치 않은 일이었고, 그건 서울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성별 역할이 뚜렷한 이 사회에서는 남자가 먼저 나서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더 짙었다. 그러니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는 나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는 남자가, 돈을 받고 남자친구 역할을 하러 가는 것이다. 박서연은 약속 이틀 전에 전화를 걸어와 몇 가지를 당부했다. "이유진 고객님은 좀 예민한 편이니까, 처음부터 너무 들이대지 마세요. 그냥 편하게, 오빠같이 굴면 돼요." "오빠같이요?" "아니, 오빠는 아니고. 아무튼 그냥 자연스럽게요." 자연스럽게. 그 말이 제일 어려웠다. 나는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거울 앞에 서서 표정을 연습했다. 웃는 얼굴, 놀라는 얼굴, 진지하게 듣는 얼굴. 스물일곱이라는 여자 앞에서 무슨 표정을 지어야 자연스러운 건지 나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약속 장소는 강남의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나는 박서연이 사전에 정해준 대로 셔츠 위에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나갔는데, 옷장 앞에서만 삼십 분을 서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셈이었다. 셔츠도 세 번을 갈아입었다. 흰색은 너무 재수생 같았고, 체크무늬는 너무 애 같았다. 결국 고른 건 무난한 남색 셔츠였는데, 거울 속의 내가 정말 데이트를 하러 가는 사람처럼 보이는지는 끝내 확신할 수 없었다. 지갑에는 데이트비 명목으로 미리 받은 돈이 들어 있었지만, 그 돈을 쓴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계속 마음에 걸렸다. 돈을 받고 밥을 먹으러 가는데, 그 밥값마저 상대의 돈으로 낸다는 게 이 관계의 기묘함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지하철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걸어가는 십 분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발걸음을 멈췄다. 그냥 돌아갈까. 아니, 이미 계약금을 받았는데 이제 와서 돌아가면 그건 사기다. 나는 억지로 발을 옮겼고, 레스토랑 유리문 앞에 서서야 겨우 숨을 골랐다. 레스토랑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 진한 회색 정장, 손목에 걸린 시계는 심플하면서도 값이 나가 보였다. 서류에 적힌 대로 스물일곱이라고 했으니 나보다 여덟 살이 많았고, 그 나이 차이가 걸음을 옮기는 동안 내 발끝을 자꾸 무겁게 했다. 여덟 살. 그 숫자를 되뇌는 동안 나는 대학교 선배들, 아니 그보다 훨씬 위의 사람들과 마주 앉는 상상을 했다. 실제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정장을 입고 시계를 찬 그녀의 모습이 그 상상을 자꾸 부풀렸다. "김도윤 씨?" 그녀가 먼저 물었다. "네, 안녕하세요. 이유진 님, 맞으시죠?" 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자리에 앉았다. "맞아요." 그녀는 짧게 답하고는 메뉴판을 내 앞으로 밀었다. "편하게 골라요. 오늘 여기 다 제 계산이니까." 나는 메뉴판을 받았지만 글자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손끝이 조금 차가워졌고, 심장은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메뉴판에 적힌 이탈리아어 이름들이 눈앞에서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파스타인지 리조또인지도 구분이 안 될 지경이었다. "저는... 이거로 할게요." 나는 아무거나 손끝으로 짚었다. "까르보나라? 첫 데이트에 그거 고르는 사람 처음 봐요." 이유진이 픽 웃었다. "아, 다른 걸로..." "아니, 괜찮아요. 저도 그거 좋아해요."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슬쩍 웃음을 지었는데, 그 웃음에는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 섞여 있었다. "긴장한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조금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거짓말을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외네. 프로필 보니까 경력이 꽤 있어 보이던데." 그 말에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프로필. 박서연이 어떤 식으로 나를 포장했는지 짐작이 갔다. 아마 대화 능력 상급, 리액션 좋음, 뭐 그런 식으로 써놓았을 게 분명했다.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요, 이게 제 첫 의뢰예요." 이유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진짜요?" "네. 연애 경험도, 사실 이런 만남도 전부 처음이라서요." 나는 말을 하면서도 이게 실수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어정쩡하게 아는 척을 하다가 나중에 들키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정직한 게 나을 것 같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유진은 물잔을 만지며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고,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의 손가락이 물잔의 물방울을 훑는 소리마저 크게 들릴 만큼 그 짧은 정적은 무거웠다. "허." 그녀가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솔직한 건 좋은데, 손님한테 그런 말 하면 환불 요청 들어올 수도 있어요." "그럼 환불해드려야겠네요." 나는 반쯤 진담으로 말했고, 그 말에 이유진이 진짜로 소리 내어 웃었다. "됐어요. 그 정도로 정직한 사람이면 오히려 믿을 만하지." 그녀는 웨이터를 불러 와인을 주문하며 덧붙였다. "은행에서 하루 종일 숫자만 보다가, 가끔은 그냥 사람이랑 밥 한 끼 먹고 싶어서 신청한 거예요. 별거 없어요." "은행에서 무슨 일 하세요?" "기업금융. 재미없어요. 물어보지 마요."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지만, 눈빛에는 정말로 지친 기색이 살짝 스쳤다. 그 말이 내 안의 어딘가를 조금 편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너무 대단한 걸 상상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로맨스 영화 속 완벽한 대화, 완벽한 리액션. 하지만 이유진이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편안한 저녁 한 끼였고, 나는 그것 하나만은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그녀는 은행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들을 이야기했다. 대출 상담을 하러 온 고객이 갑자기 화를 냈다는 이야기, 팀장이 이상한 지시를 내렸다는 이야기, 재테크 유튜브를 보다가 손해를 봤다는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그 고객은 어떻게 됐어요?" "결국 대출 승인 났어요. 화낸다고 될 일이 아닌데, 화내면 되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그런 사람 보면 좀 무섭던데." "무서워하지 마요. 그럴 땐 그냥 웃으면서 규정 읽어주면 돼요. 은행원의 특권이죠." 그녀가 눈썹을 살짝 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대화는 생각보다 매끄럽게 이어졌고, 나는 어느 순간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걸 느꼈다. 와인 한 잔이 들어가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웃음이 생각보다 편안해서인지, 처음의 뻣뻣함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의뢰가 이렇게 끝날 수도 있겠다는 안도감이 조금씩 차올랐다. 하지만 그 안도감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웨이터가 디저트 메뉴판을 놓고 갔다. 이유진은 그 메뉴판을 펼쳐보지도 않고 접시 옆에 밀어두었다. 그러고는 손끝으로 와인잔의 테두리를 한 번 훑더니, 문득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도윤 씨, 혹시 나중에 다시 신청해도 돼요? 다음엔 좀 더... 진짜 커플처럼요." 그 말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진짜 커플처럼. 그 말이 정확히 어떤 걸 의미하는지 몰라,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미루었다. 그녀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에 무언가 다른 온도가 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온도가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했고, 그걸 안다고 해도 지금 당장 대답할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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