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약속 장소는 대학로의 조용한 한옥 카페였다. 나는 박서연이 알려준 대로 미리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손끝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좁은 골목길에는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었고, 카페 안쪽 나무 창살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은근히 서늘했다. 첫 의뢰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긴장이었다.
이유진과의 만남에서는 상대가 나와 비슷한 처지의 초심자였다는 걸 알게 되면서 마음이 편해졌지만, 한지원은 다를 것 같았다. 나이 차이, 직함, 그리고 학문적인 배경까지, 그녀의 존재감은 아직 만나기도 전부터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강사.
그 단어를 몇 번이나 곱씹었는지 모른다. 대학 강의실에 서는 사람. 나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책을 읽었을 사람. 그런 사람이 나 같은 학생을 상대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걸까, 그 궁금증이 손끝의 냉기와 함께 자꾸만 커져갔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옅은 김이 테이블 위로 흩어지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들어온 여자는 예상보다 훨씬 담담한 인상이었다. 단발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 무채색 옷차림. 화려함보다는 단정함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걸음걸이에는 오랜 시간 강의실에서 다져진 특유의 침착함이 배어 있었다. 손에 든 가방도 단순했고, 걸음의 폭도 일정했다.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김도윤 씨죠." 그녀가 자리에 앉으며 나를 훑어보았다. 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한지원 교수님, 맞으시죠?"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교수는 아니고 강사예요. 그렇게 불러도 되지만." 그녀가 정정하며 짧게 웃었다. "편하게 앉아요. 여기 대추차가 맛있는데, 마셔볼래요?"
"네, 좋아요."
주문이 끝나고 나서, 한지원은 잠시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이유진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유진이 조금 신기하다는 듯 나를 봤다면, 한지원의 시선에는 뭔가를 가늠하는 듯한 냉정함이 섞여 있었다. 마치 강의 첫날, 새로 들어온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는 것처럼.
이 사람은 나를 평가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등을 조금 더 곧게 세웠다.
"프로필을 보고 신청했어요."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서울대생이라고요?"
"네, 맞아요." 나는 조금 놀라며 대답했다. "저... 그런데 혹시 사학과 쪽이세요?"
"맞아요. 한국사학과에서 강의해요." 그녀는 대추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학교 안에서 학생을 만나는 게 좀 이상하죠? 나도 그게 마음에 걸려서 사실 신청을 미룰까 했는데."
"괜찮아요." 나는 말했다. 실제로는 조금 신경 쓰였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지금 이 순간에는 맞는 것 같았다.
"정말 괜찮아요?" 그녀가 재차 물었다. 그 짧은 반문에는 확인하려는 의도가 분명하게 담겨 있었다.
"네. 학교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나는 조금 더 단단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그 말에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오 년 전에 이혼했고, 그 뒤로는 혼자 사는 게 익숙해져서 오히려 편하다고 했다. 처음 몇 년은 밤마다 텅 빈 집이 낯설어서 잠이 오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침묵조차 하나의 일상이 되었다고. 다만 가끔, 정말 가끔은 누군가와 마주 앉아 저녁을 먹는 그 단순한 일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그녀의 표정에는 미간에 옅은 잔물결이 스쳤다가 곧 사라졌다.
나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강한 사람도 결국 혼자인 시간 앞에서는 흔들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이런 서비스, 처음이세요?" 내가 물었다.
"처음이에요. 동료 교수가 추천해줬어요. 그것도 웃긴 상황이었죠, 우리 나이에."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교수님도 이런 걸 이용하실 줄은 몰랐어요." 내가 솔직하게 말하자, 그녀는 픽 하고 웃었다.
"강사예요, 교수 아니고." 그녀가 다시 정정했다. "그리고 나이 먹을수록 오히려 이런 게 더 필요해요. 새로운 사람 만날 기회 자체가 줄어드니까."
대화는 예상보다 편안하게 이어졌다. 나는 그녀가 강의하는 조선 후기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진심으로 흥미를 느꼈고, 몇 가지 질문을 던지자 그녀의 눈빛이 순간 밝아졌다. 학문에 대한 애정이 진심이었다는 걸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실학자들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인물이 있으세요?" 내가 물었다.
"정약용이요. 흔한 대답이긴 한데," 그녀가 어깨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유배지에서도 학문을 놓지 않았다는 게 늘 감탄스러워요. 나라면 그 상황에서 절망만 하고 있었을 것 같은데."
"저는 유배지에서 뭘 했는지 자세히는 몰라서요."
"그럼 얘기해줄까요?"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네, 궁금해요."
그녀는 강진에서의 십팔 년,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써내려간 과정, 그리고 그 시절 학자들이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을 이어간 방식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말투는 강의실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았지만, 나에게는 어렵지 않게 다가왔다. 오히려 재미있었다.
"학생인데 역사에 관심이 많네요." 그녀가 말했다.
"고등학교 때 국사 성적이 제일 좋았어요. 지금은 전공이 달라서 아쉽지만요."
"무슨 전공인데요?"
"경영학이요."
"아깝네." 그녀가 짧게 말했다. 그 말에 담긴 진심이 느껴져서, 나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교수님, 아니, 강사님도 학생 때는 다른 전공이셨어요?" 내가 물었다.
"국문과였어요. 대학원 오면서 사학으로 넘어왔죠. 그때는 다들 미쳤다고 했어요."
"왜요?"
"먹고 살기 힘든 학문이니까." 그녀가 웃으며 대추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해요. 그게 제일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그 말이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두 시간 가까이 대화가 이어졌고, 창밖의 햇살이 어느새 노을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한지원은 계산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도 부탁하고 싶은데, 도윤 씨는 어때요?"
"저도 괜찮았어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좋아요." 그녀가 작게 웃으며 카페를 나섰고,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번 의뢰도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문을 나서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처음 들어올 때와 똑같이 일정했다. 흔들림 없는 사람.
그런 인상이 오래 남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오늘 나눈 대화들을 하나씩 되짚어보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 유배지의 학자,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 이유진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시간이었지만, 그 나름의 편안함이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구나.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골목을 지나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박서연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다급했다.
"도윤 씨, 지금 통화 가능해요?"
"네, 무슨 일이세요?" 나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강혜린이라는 손님 알아요? 강씨 가문 쪽 있잖아요, 그 재벌 집안." 박서연이 빠르게 말했다. "거기 막내딸이 도윤 씨를 지정해서 의뢰를 넣었어요. 조건이 좀 특이한데, 일단 만나서 얘기해봐야 할 것 같아요."
"저를 지정했다고요?" 내가 되물었다. "왜요? 저를 어떻게 알고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프로필을 봤겠죠. 근데 이번엔 좀 다른 느낌이에요." 박서연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조심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일단 조건부터 좀 이상해서, 만나기 전에 저랑 먼저 얘기 좀 해요."
나는 그 이름을 들으며 새로운 종류의 불안이 스며드는 걸 느꼈다.
재벌가.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이전의 두 의뢰와는 확실히 다른 차원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유진의 순박함과 한지원의 담담함, 그 두 개의 온도 사이에서 겨우 균형을 잡아가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또 어떤 얼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조건이 어떤데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만나서 얘기해요. 전화로 하기엔 좀 그래서." 박서연이 말을 흐렸다.
전화로 하기엔 좀 그런 조건.
그 말이 유난히 마음에 걸렸다. 통화를 끊고 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어두워지는 골목을 바라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