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창끝이 눈앞에서 흔들리는 걸 보며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췄는데, 그 동작이 지나치게 매끄러워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손끝이 먼저 반응했고, 무릎이 굽혀지며 중심이 아래로 떨어졌으며, 등줄기가 활처럼 휘어지는 것이 마치 수백 번 반복해온 동작처럼 자연스러웠다. 이 몸은 분명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나, 근육의 반응은 오래전부터 훈련된 것처럼 정확했고, 그 사실이 두려움보다 앞서 낯선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대체 이 몸의 원래 주인은 누구였을까. 어떤 삶을 살았기에 창끝 앞에서도 이토록 정교하게 반응할 수 있는 몸을 갖게 된 걸까. 그러나 감상에 잠길 여유는 없었다.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즉결 처분이다." 앞장선 자가 낮게 경고했고, 그 뒤로 늘어선 자들의 창끝이 일제히 그를 향해 조여들었다. 석실 안은 습하고 서늘했으며, 벽을 따라 박힌 낡은 조명이 깜빡거릴 때마다 병사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줄어들었다. 미등록 개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이 지금 이 세계의 규칙에서 벗어난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등록이라는 절차, 개체라는 호칭, 그 모든 것이 이 세계에서는 당연한 질서인 듯 병사들의 눈빛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때 눈앞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처음엔 그것이 자신의 정신이 만들어낸 환각인가 싶었으나, 그 창은 또렷하게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긴급 구제 프로그램 가동. 대상자는 중앙각성관리소 규정 제17조에 의거, 폭주 개체로 분류되어 처분 대기 중입니다. 5분 내 등록된 오메가와의 결속 계약을 완료하지 않으면 처분이 집행됩니다.] 그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는데, 두 번째에도 이해가 쉽지 않았다. 처분. 그 단어가 자신의 목숨을 뜻한다는 것만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오메가라는 단어도 낯설었고, 결속 계약이라는 것도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좁혀지는 창끝들이 그 낯섦을 곱씹을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숨이 가빠 왔다. 심장이 낯선 리듬으로 뛰는 걸 느끼며 그는 처음으로 이 몸의 공포를 자신의 것처럼 받아들였는데,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오고 입안이 바짝 말라가는 감각이 너무도 생생해서 이것이 남의 몸이라는 사실조차 잊을 지경이었다. 그 순간 석실 안쪽 문이 다시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새로 들어섰다. 발소리가 절도 있게 울렸고, 앞장선 병사들이 일제히 자세를 낮추며 물러섰는데, 그 뒤로 나타난 이는 검은 정장에 은빛 문양을 두른 한 여성이었다. 키가 크고 자세가 곧았으며, 눈매가 서늘하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그녀의 등장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는 걸 그는 즉각 느꼈다. 병사들의 창끝이 일순 흔들렸다가 다시 자리를 찾는 것을 보며, 이 여자가 이 공간에서 가지는 권위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자입니까." 그녀가 묻자 병사 하나가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청하그룹 대표님, 등록 절차상 오늘 자정까지 결속자를 확정하지 못하면 처분 대상입니다." 대표라는 호칭이 그녀에게 붙는 것을 들으며 그는 청하그룹이라는 이름이 이 세계에서 어떤 무게를 지녔는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병사들의 태도, 그들의 낮춘 시선, 조심스러운 말투 하나하나가 그 이름의 무게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도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는 동정도 경멸도 없었으며, 마치 서류의 한 줄을 검토하는 듯한 무심함만이 담겨 있었다.
[남은 시간 4분 30초.] 시스템 창이 무심하게 시간을 갈아먹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선택권이라는 게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러웠으나, 그녀가 내민 서류를 보는 순간 손이 먼저 떨렸다. 종이는 얇고 차가웠으며, 그 위에 적힌 글자들은 지나치게 사무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4년. 서류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4년간의 결속 계약, 그 기간이 끝나면 쌍방 합의로 해지 가능. 조건도 대가도 설명되지 않은 채, 그저 서명 한 줄만이 남겨져 있었다. 그는 그 서류를 몇 번이고 눈으로 훑었는데, 읽을수록 이해되는 것은 없고 오히려 의문만 늘어났다. 결속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배우자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쓰이는 세계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는 목숨이 걸린 선택 앞에 서 있었다.
"거절하면 어떻게 되죠." 그가 겨우 목소리를 내어 묻자,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답했다. "거절할 시간은 이미 지났습니다." 그 말이 얼마나 사무적으로 들렸는지, 그는 오히려 그 냉정함에서 이상한 안도를 느꼈다. 적어도 이 여자는 동정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 무미건조함이 지금 이 순간에는 차라리 신뢰할 만한 것으로 다가왔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거짓으로 유인할 이유도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제가 거부하면, 저 처형당하나요." 다시 물었으나 그녀는 대답 대신 시스템 창을 향해 눈짓했다. [남은 시간 2분 47초.] 그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함께 보며, 그는 이것이 대답이라는 걸 깨달았다. 말보다 숫자가 더 정확한 위협이었다.
[남은 시간 1분 12초.] 그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서류에 손을 얹었다. 손끝이 종이에 닿는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이것이 옳은 선택인지 확신할 수 없었으나, 창끝이 좁혀오는 현실 앞에서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서명이 새겨지는 순간 사슬의 흔적이 남은 손목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 열기가 팔을 타고 어깨까지 번지는 걸 느끼며 그는 짧게 숨을 삼켰다. 이건 뭘까, 라는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스템 창에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결속 계약 성립. 계약자: 서유라. 피결속자: 이종. 계약 기간 4년. 완수 시 요리 시스템 완전 개방 및 현실 보상 지급.]
이종이라는 이름을 시스템이 스스로 부여했다는 것도, 이 낯선 이름이 이제 자신의 새로운 신분이 되었다는 것도 그는 뒤늦게 받아들여야 했다. 이종. 원래 자신의 이름조차 아니었던 그 두 글자가 어느새 손목의 열기와 함께 몸에 새겨진 것 같았다. 병사들이 창을 거두고 물러나는 동안, 서유라는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그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따라오세요. 앞으로 4년, 당신은 제 배우자입니다." 그 말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으며, 마치 계약서의 조항을 낭독하는 것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그 손을 잡는 순간 그는 이것이 구원인지 새로운 유폐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손목에 남은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는 동안, 그는 자신이 방금 서명한 것이 대체 어떤 종류의 계약이었는지, 요리 시스템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그녀의 뒤를 따라 석실 밖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