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천유국은 알파와 오메가의 서열이 신분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나라였는데, 그 규율은 건국 초기부터 국법으로 명시되어 있었고 알파는 통솔과 결속의 권한을 지니되 오메가와 결속하지 않으면 사회적 신뢰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결속하지 않은 알파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미완의 존재'로 취급받았고, 반대로 결속하지 않은 오메가는 보호받지 못하는 위태로운 신분으로 여겨졌다. 그런 사회에서 청하그룹은 삼십 년 가까이 유통과 물류를 장악해온 거대 기업이었으며, 서유라는 오메가로서 그 자리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었다. 오메가가 기업을 이끈다는 사실 자체가 이례적이었기에, 그녀를 둘러싼 소문은 항상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천유국 최초의 오메가 총수, 완벽한 자기 관리의 표본'이라는 신문 기사였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결속자를 계약으로만 들이는 냉혈한이라는 뒷말이었다. 두 소문 모두 그녀를 인간이 아닌 상징으로 만들었으며, 서유라 자신은 그 어느 쪽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완벽한 자기 관리의 표본. 그 문장을 곱씹으며 이종은 저택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소파는 지나치게 푹신했고 그 푹신함이 오히려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맞은편에는 서유라가 서류를 정리하며 좀처럼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는데, 그녀의 손끝이 종이를 넘기는 속도가 일정했고 그 일정함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까지 옮겨온 것 같았다. 벽시계가 세 번 울렸을 무렵에야 그녀가 서류 한 뭉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 계약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청하그룹은 미결속 오메가 CEO라는 약점을 안고 있고, 4년간 안정적인 알파 배우자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그 자리를 채우고, 계약이 끝나면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지나치게 정확한 설명이었으며, 지나치게 감정이 배제된 어조였다. 이종은 그 담담함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는데, 이 세계에서 결속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겁게 다뤄지는지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는 서류의 조항들을 눈으로 훑었다. 4년, 갱신 없음, 위약금 조항, 외부 노출 시 대응 지침까지 빼곡하게 적혀 있었는데, 그 어디에도 애정이나 신뢰 같은 단어는 없었다.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이종이 묻자 서유라가 처음으로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눈은 계약서를 읽을 때와 똑같은 온도를 담고 있었다. "어차피 계약자니까, 대답할 수 있는 건 대답하죠." "왜 굳이 저 같은 미등록 개체를 고른 겁니까. 등록된 알파도 많을 텐데요." 그 질문에 서유라의 손끝이 서류 위에서 잠시 멈추었다. 아주 짧은 정지였으나 이종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등록된 알파는 대부분 가문이나 세력을 등에 업고 있습니다. 그들과 결속하면 그 뒤에 딸린 것들도 함께 받아들여야 하죠." 그녀가 서류를 탁 소리 나게 덮으며 말을 이었다. "가문의 채무, 정치적 이해관계, 심지어 그쪽 부모의 은퇴 후 자리까지."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덧붙였다. "당신은 아무것도 없더군요. 그게 안전하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이종의 가슴 어딘가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서글펐다. 그는 실제로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도, 가족도, 심지어 이 삶 이전의 기억조차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 부를 수 없었으니까.
"안전하다." 이종이 그 말을 그대로 따라 말하자 서유라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왜, 마음에 안 듭니까?" "아니요. 그냥, 사람을 안전 부품처럼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요." 그러자 서유라가 짧게 웃었는데,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 숨을 짧게 내뱉는 소리에 가까웠다. "여기서 결속은 부품 교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감정이 섞이면 오히려 위험해지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고, 이종은 그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완벽한 자기 관리의 표본이라는 문장이 다시 떠올랐는데, 이번에는 그것이 칭찬이 아니라 경고처럼 들렸다.
대화는 그쯤 끊어질 듯했으나, 서유라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며 물었다. "요리는 어디서 배웠습니까." 이종은 순간 말을 고르며 대답을 미루었는데, 전생의 경력을 그대로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원 손질하던 사람들이 다녀간 자국이 창밖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그 위로 초저녁 그늘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냥, 손에 익었습니다." 그는 얼버무렸고, 서유라는 그 대답을 곧이 믿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손에 익은 것과 실력이 있는 건 다른 얘기죠." "그럼 뭐라고 대답해야 만족하시겠습니까." "만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같은 온도를 유지했는데, 그 일관됨이 오히려 이종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녀가 창밖을 응시한 채 짧게 덧붙였다. "박기범이 당신을 쫓아내려 할 겁니다. 그 사람 자존심이 대단하니까요." "박기범이 누굽니까." "이 저택 요리사입니다. 아버님 대부터 20년 가까이 주방을 지켜온 사람이라, 자리를 위협받는다 느끼면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이 걱정처럼 들리기도 했으나, 이종은 그 목소리에서 온도를 느낄 수 없었다. 걱정이라면 걱정하는 사람의 얼굴을 봐야 알 수 있을 텐데, 서유라는 계속 창밖만 보고 있었다.
그때 서유라의 눈빛이 아주 짧게 흔들렸는데, 그것은 창밖 어딘가를 향한 것이었다. 그녀의 등이 순간 굳었고, 손가락이 창틀을 가볍게 짚었다. 이종이 따라 시선을 돌리자 정원 담장 너머로 낯선 인영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었고,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담장을 따라 조금씩 이동하는 모습이 마치 사냥감의 위치를 재는 짐승들 같았다. 그들의 존재를 알아챈 저택 경비들이 서둘러 움직이는 게 창을 통해 흐릿하게 비쳤고, 무전기 같은 것을 든 경비 하나가 저택 쪽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저건 뭡니까." 이종이 묻자 서유라의 표정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서류를 정리하던 그 손끝의 담담함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알파 연합 쪽 감시자들입니다. 미등록 개체가 결속했다는 소식이 벌써 퍼진 모양이군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짜증과 경계가 동시에 섞여 있었다. "생각보다 빠르네요." 그녀가 낮게 중얼거리듯 덧붙였는데, 그것은 이종을 향한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저들이 당신을 노릴 겁니다." 그 한 문장이 남긴 무게를 이종이 다 소화하기도 전에, 저택 바깥에서 짧은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뒤이어 다급한 발소리가 뒤섞여 저택 안까지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