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만화상단은 성 북쪽, 상권의 중심에 자리한 대형 상단이었다.
건물 규모만 봐도 성 안에서 손꼽히는 부를 가진 상단임을 알 수 있었다. 높은 담장과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대문이 그 위세를 짐작케 했다. 지나다니는 행인들도 그 앞을 지날 때면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고 고개를 돌려 담장을 훑어보곤 했다.
이서연은 사흘에 걸쳐 상단 주변을 관찰했다. 정문으로는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신분증도, 소개장도 없는 그녀를 받아줄 곳이 아니었다.
첫날은 상단 앞 찻집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익혔다. 둘째 날은 상단 담장을 따라 골목을 두 바퀴 돌며 구조를 눈에 담았다. 담이 이어지는 방향, 뒷문의 위치, 창고로 짐이 들어가는 길목까지 하나하나 셈했다. 셋째 날이 되어서야 그녀는 사람을 고르기 시작했다.
정문으로 드나드는 상단의 표사들은 눈빛이 매서웠고 지나치는 사람마다 훑어보는 습관이 있어 다가갈 틈이 없었다. 대신 그녀는 상단에 드나드는 짐꾼과 하인들을 눈여겨보았다. 그중 유독 지친 얼굴로 매일 같은 시간에 나오는 늙은 짐꾼 하나가 있었다. 등이 굽고 걸음이 무거운 노인이었다. 다른 짐꾼들이 서로 농을 주고받으며 걷는 것과 달리, 그는 늘 혼자였다.
사흘째 되는 날, 이서연은 그 짐꾼이 무거운 짐을 들다 넘어지는 것을 보았다. 짐이 흙바닥에 쏟아졌다. 곡물 자루가 터져 낟알이 흩어졌고, 노인은 힘겹게 무릎을 꿇은 채 그것을 주워 담으려 했다.
주변을 지나던 다른 이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것이 이 거리의 방식이라는 걸 이서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상단 앞에서는 누구도 남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저 없이 다가가 짐을 함께 주웠다.
"괜찮으십니까." 그녀가 물었다.
짐꾼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는 일이 드문 모양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경계와 당혹이 뒤섞여 있었다.
"괜찮소, 괜찮소." 그가 손을 내저으며 짐을 다시 챙겼다. "고맙소, 처자."
이서연은 흩어진 낟알을 마지막까지 자루에 쓸어 담고서야 손을 털었다. 짐꾼은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는 눈치였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디까지 가시는지요."
"아니, 아니, 그럴 필요 없소." 노인이 사양했지만, 이서연이 이미 짐 한쪽을 들어 올린 뒤였다. 노인은 결국 못 이기고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상단 뒤편 창고였다. 걸어가는 동안 그녀는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이 상단, 규모가 정말 크네요. 오래 일하셨습니까."
"이십 년 넘었지." 짐꾼이 답했다. 짐을 진 어깨가 조금씩 떨렸다. 나이 탓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요즘은 예전 같지 않아. 상단주가 바뀌고부터 분위기가 흉흉해졌소."
"상단주가 바뀌었습니까."
"작년쯤이었지." 노인이 목소리를 낮췄다. 주변을 한 번 살피는 것이 버릇처럼 보였다. "원래 상단주가 갑자기 병으로 죽고, 그 조카라는 사람이 자리를 이었소. 그런데..." 그가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그 사람이 온 뒤로 밤마다 창고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그리고 몇몇 하인은 아예 사라졌지. 상단에서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소."
이서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러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순간 표정을 관리하는 법은 백현담에게 배운 것 중 가장 먼저 익힌 기술이었다.
"사라진 하인들이 몇이나 됩니까."
"내가 아는 것만 셋이오." 노인이 손가락을 접으며 셈했다. "젊은 애 둘, 나이 든 이 하나. 다들 갑자기 없어졌지. 가족에게 연락도 없었다고 하더군."
"그 상단주의 이름을 아십니까."
"곽자헌이라 하오." 짐꾼이 답했다. "본 적은 몇 번 있는데, 이상하게 항상 표정이 똑같소.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다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 처음엔 그냥 근엄한 사람인가 했는데, 볼수록 사람 같지가 않아."
이서연은 그 말을 마음에 새겼다. 표정이 항상 똑같다는 것. 인간의 감정을 완벽히 흉내 내지 못하는 개체의 특징일 수 있었다. 백현담의 노트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었다. '인귀는 감정 표현을 학습하지만,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까지는 완전히 재현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되새겼던 밤들을 떠올렸다. 스승은 종종 그 노트를 펼쳐 놓고 촛불 아래서 같은 구절을 손끝으로 짚어가며 읊어주었다.
'표정이란 근육의 습관이다. 습관은 시간이 만든다. 시간을 살지 않은 것은, 아무리 흉내 내도 어색함을 감출 수 없다.' 그의 말이 지금 이 순간 그대로 되살아났다.
"감사합니다." 이서연이 짐을 창고 안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짐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창고 안에 낮게 울렸다.
"당신, 이런 걸 왜 묻는 거요." 짐꾼이 그제야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방금까지의 고마움은 순식간에 경계로 바뀌어 있었다.
이서연은 잠시 망설였다. 거짓을 덧붙일 수도 있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상대의 입을 닫게 만들 것 같았다.
"제 스승님이 이 상단과 관련해 조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돌아가셨습니다." 이서연이 솔직하게 답했다.
짐꾼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피더니, 이내 시선을 떨어뜨렸다.
"...조심하시오." 그가 낮게 말했다. "이 상단, 겉보기와 다르오. 나도 더 이상은 말 못 하오.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서둘러 자리를 떴다. 굽은 등이 창고 안쪽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이서연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노인의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멎을 때까지,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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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이서연은 상단 담장 밖에서 다시 그 건물을 바라보았다.
곽자헌. 상단주. 표정이 항상 똑같은 남자.
스승이 쫓던 것이 바로 이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스승을 죽인 것도 바로 이 사람일 것이었다.
이서연은 허리에 찬 단검을 손으로 쓸었다. 백현담이 남긴 유일한 물건이었다. 손잡이에 새겨진 무늬는 오랜 손길로 닳아 있었다. 그 무늬를 만질 때마다 그녀는 스승의 손이 거기 있었던 시간을 함께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검을 뽑는 순간에는, 이미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라.' 그의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렸다. 백현담은 늘 검을 뽑기 전에 세 번을 생각하라 일렀다. 상대가 무엇인지, 이길 수 있는지, 물러설 곳이 있는지. 셈이 서지 않으면 칼집에서 손을 떼라 했다.
그녀는 아직 검을 뽑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상대의 정체도, 힘의 크기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다. 무모하게 뛰어드는 것은 스승의 가르침과도 맞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담장을 따라 좀 더 걸으며 건물의 구조를 눈에 담았다. 창고 위치, 경비의 배치, 밤에 불이 켜지는 방들. 정문 쪽에는 표사 둘이 교대로 서 있었고, 뒤편 작은 문 쪽은 상대적으로 인적이 드물었다. 창고 지붕 위로 옅은 등불 빛이 비쳤다가 곧 꺼졌다. 누군가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때, 상단 뒤편 작은 문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서연은 반사적으로 담장 뒤로 몸을 숨겼다. 숨소리마저 낮추고, 발끝의 체중을 조심스레 옮겼다. 이런 순간의 침묵은 그녀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백현담과 함께 다니던 시절, 밤을 틈타 은신처를 살피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문이 열리고, 키가 크고 마른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짐꾼이 말했던 것처럼, 그의 표정은 이상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웃는 것도 아니고 무표정한 것도 아닌,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얼굴이었다. 걸음걸이마저 지나치게 규칙적이어서, 마치 정해진 보폭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주위를 살피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정확히 이서연이 숨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그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그가 이미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담장의 그림자가 짙었음에도, 그의 시선은 정확히 그녀의 눈높이를 겨누고 있었다.
이서연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크게 한 번 뛰고, 그 뒤로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위기 앞에서 오히려 냉정해지는 것, 그것 역시 백현담이 그녀에게 남긴 습관이었다.
'들켰다.' 그녀는 그 사실을 직감했다.
남자의 입꼬리가 서서히, 부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는, 웃음을 흉내 내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근육이 제멋대로 당겨진 듯한, 어색하고 뒤틀린 모양이었다.
"거기, 누구요." 남자의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낮고 담담했으나, 그 안에는 분명한 위협이 실려 있었다.
이서연은 숨을 죽였다.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정체를 확인할 것인가.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 지나치게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담장의 돌 틈에 손끝을 대고, 그녀는 몸의 무게를 뒤로 옮길지 앞으로 옮길지 가늠했다. 어느 쪽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담장 너머로, 남자의 발소리가 천천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지나치게 균일한 박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