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저택 대문이 열리자 마당 가득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등불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어지러운 빛을 뿌렸다.
"아가씨! 아가씨가 오셨다!"
누군가의 외침이 마당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에 여기저기서 문이 열리고, 잠에서 덜 깬 얼굴들이 튀어나왔다.
박집사라는 중년의 남자가 다급히 달려나와 한서아를 받아 안았다.
그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아가씨, 아가씨! 정신 좀 차려보세요!"
대답이 없었다.
그는 곧 목청을 높였다.
"의원! 의원을 불러라! 당장!"
마당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하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누군가는 물을 떠오고 누군가는 이불을 가져왔다.
나는 그 어수선함 속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가.)
그런 생각이 스쳤다.
곧 흰 옷을 입은 노인이 서둘러 도착했다.
지팡이도 짚지 않고 뛰어온 듯, 숨이 거칠었다.
김의원이라고 소개된 그가 맥을 짚고 눈꺼풀을 살폈다.
손끝이 익숙하게 움직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마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의 손끝에 매달렸다.
"향약 중독입니다. 정신을 잃게 하는 향입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위험한 건가요?"
내가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조치가 빨랐으니 하루 안에 회복될 겁니다. 다만 며칠은 몸이 무거울 겁니다."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가슴 안쪽에서 뭔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소이가 옆에서 조용히 웃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녀의 목소리에도 안도가 묻어 있었다.
한서아가 방으로 옮겨진 뒤, 사람들의 발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나는 마당 한쪽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잠시 숨을 돌렸다.
밤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낮았던 흥분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몸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제야 손등에 긁힌 상처와 어깨의 뻐근함이 느껴졌다.
소이가 물 한 잔을 들고 다가왔다.
사기그릇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이거 드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정신이 조금씩 맑아졌다.
빈 그릇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문득 궁금했던 걸 물었다.
"소이 님은 어떻게 그 순간에 오신 거예요?"
그녀가 잠시 눈을 내렸다.
달빛이 그녀의 옆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저는 원래 순찰조를 따라나섰다가... 어쩌다 보니 그쪽 소리를 들었어요."
말을 아끼는 듯한 태도였다.
손가락이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은 캐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더 묻지 않고 넘겼다.
"근데 한 가지 여쭤도 될까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기해경이라는 게... 정확히 뭔가요?"
소이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것도 모르고 오셨어요?"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이 섞여 나왔다.
"그게... 사정이 좀 있어서요."
나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소이는 더 캐묻지 않고 짧게 설명해주었다.
"기해경은 기해를 다스리는 수련의 단계를 뜻해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허공에 층을 그리듯 설명했다.
"1층부터 시작해 위로 올라갈수록 다루는 기운의 질과 양이 완전히 달라져요. 낮은 층의 수련자와 높은 층의 수련자는 아예 다른 무공을 쓰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그렇게나 차이가 커요?"
"네. 저 같은 3층 수련자는 5층 수련자를 상대할 방법이 거의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살짝 배어 있었다.
"강도현 두령님 같은 분은 무술가로 오래 단련하셔서, 기해경 수련자와는 아예 다른 차원의 힘을 쓰세요."
"차원이 다르다는 게..."
"수련자 열 명이 붙어도 감당이 안 될 정도라는 뜻이죠."
나는 그 말에 아까 염삼과 염이를 상대로 겪었던 열세를 떠올렸다.
칼끝의 무게, 숨이 턱까지 차오르던 순간, 손목이 저릿하게 울리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 정도로도 벅찼는데, 강도현이라는 사람은 그보다도 위라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무심코 손목을 감싸 쥐었다.
"강도현 두령님은 한가에서 어떤 위치인 거예요?"
"가주님의 은인이세요."
소이가 목소리를 낮췄다.
"몇 년 전 위험에서 구해드린 뒤로 시위 두령으로 모시고 계셔요. 한가의 무력 전체를 그분이 통솔한다고 봐도 무방해요."
소이의 목소리에는 존경심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 어딘가에 미묘한 경계가 스치는 것도 느껴졌다.
입꼬리는 웃고 있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그냥 순수한 존경만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그 이질감을 마음속 어딘가에 눌러 담았다.
그때 박집사가 다가왔다.
그의 걸음이 빠르고 딱딱했다.
"가주님이 부르십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말에 담긴 무게가 느껴졌다.
나는 소이와 눈짓을 나누고 그를 따라 안채로 향했다.
복도는 어두웠고, 발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등불이 걸린 벽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넓은 마루에 앉아 있던 한덕수가 나를 응시했다.
중년의 남자였지만 눈빛은 날카롭고 단단했다.
앉은 자세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마루 아래에 선 나는 자연스레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자네가 내 딸을 구했다고 들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나는 짧게 답했다.
괜한 말을 덧붙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운이라..."
한덕수는 잠시 침묵했다.
그 정적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바깥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소리마저 이 방 안에서는 조심스럽게 죽어드는 듯했다.
"자네는 어디서 온 사람인가. 이름도, 소속도 들어본 적이 없어."
나는 순간 말을 골랐다.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어. 청명대륙 밖에서 왔다고 하면...)
어떤 대답을 내놓아도 의심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먼 지방에서 온 무명 수련자입니다."
"무명이라..."
그의 눈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 시선이 마치 옷 아래 감춘 것까지 꿰뚫어보려는 듯했다.
잠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정적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등에 식은땀이 배었다.
"딸을 구한 은혜는 잊지 않겠다."
그가 낮게 말했다.
"하지만 사정이 밝혀지기 전까지, 자네는 객실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말투는 다정했지만, 그 안에는 명백한 명령이 실려 있었다.
나는 반박할 처지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박집사의 안내로 객실에 들어서자 문이 조용히 닫혔다.
탁,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방 안은 단정했지만, 어딘가 감시받는 느낌이 가득했다.
가구는 정갈했고, 이불도 새것이었지만, 그 정갈함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보초를 서는 사람의 그림자가 스쳤다.
한 번, 두 번, 규칙적으로 오가는 걸음이었다.
(결국 갇힌 거네.)
나는 침상에 걸터앉아 손목의 옥패각을 내려다봤다.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천명 시스템] 임무 완료: 한서아 구출.
[천명 시스템]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메시지가 떴다가 곧 사라졌다.
나는 그 익숙한 문구를 눈으로 좇으며 잠시 안도했다.
그런데 그 아래로, 뭔가가 희미하게 깜빡였다.
마치 다음 문장이 뜨려다가 지워지는 것 같은 잔상이었다.
(뭐지, 저건.)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손목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글자의 형체 같은 것이 어른거렸지만, 알아볼 수 있는 모양은 아니었다.
하지만 화면은 이미 잠잠해진 뒤였다.
나는 한동안 손목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방 안의 정적이 다시 무겁게 내려앉았다.
창밖 보초의 발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이어질 뿐이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