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 저택, 제가 지키겠습니다

4화

그 실루엣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눈을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다음 순간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마술사도 아니고, 그렇게 완벽하게 사라질 수가 있나.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굳어 있었다. 소율이 내 팔을 잡아끄는데도 발이 안 떨어졌다. 눈이 마주쳤다는 확신, 그게 나를 붙잡고 있었다. 착각이었을까.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목적이 있었다. 뭔가를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도련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 소율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소율의 손이 내 팔을 흔들고 있었는데, 그제야 그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보다 소율이 더 놀란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그냥 좀……"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맞는 말이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도 내가 괜찮은지 모르겠으니까. "저 사람, 시경 쪽 사람이겠죠." "확실하진 않지만, 저런 식으로 접근하는 건 대부분 그쪽이에요." 소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주변을 살피는 눈치였다. 나도 덩달아 어깨가 굽었다. 누가 또 어디서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갑자기 이 저택 담벼락 전체가 눈으로 뒤덮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홍련에게 이 일을 알렸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숨겼다가 나중에 들키면 그게 더 문제니까. 예상대로 홍련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원래도 표정이 많지 않은 사람인데, 이럴 때는 확실히 표가 났다. "규율을 어기셨습니다." "알아요. 그런데 그게 소율을 지키는 방법이었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절반의 진실이었을 뿐이지. 소율을 지키려던 것도 맞고, 궁금해서 따라갔던 것도 맞으니까. 어느 쪽이 더 큰 이유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홍련은 나를 한참 응시했다. 그 시선이 얼마나 길었는지, 내가 먼저 눈을 피할까 고민할 정도였다. 그 눈빛에서 처음으로, 화가 아닌 다른 감정을 읽었다. 걱정이었다. "다음부터는 저와 함께 움직이십시오. 혼자 위험을 감수하시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용납할 수 없다는 말이, 이상하게 다정하게 들렸다. 원래 저 사람 말투가 이런가. 명령형인데 왜 이렇게 안심이 되는지. "네, 알겠어요." 대답은 순순히 했지만, 다음에 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지는 나도 확신이 없었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걸 어떡해. · 그날 저녁, 서은이 나를 도서관으로 불렀다. 저택의 도서관은 늘 서늘했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코끝에 걸렸다. 책장 사이로 들어서니, 그녀는 낡은 지도 한 장을 펼쳐놓고 있었다. 촛불 하나만 켜둔 채로. 분위기가 은근히 비밀스러웠다.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인가 싶었다. "선우강철 님의 일기가 저택 어딘가에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정확한 위치는 저도 모릅니다." "단서라도 있어요?" "이 지도, 저택 개축 이전의 도면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방이 몇 개 있습니다." 지도 위에는 손으로 표시한 붉은 점 몇 개가 찍혀 있었다. 종이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도 부서질 것 같았다. 그중 하나는 지금의 응접실 자리였다. "이 방들 중 하나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겠죠." "저도 그렇게 추정합니다. 하지만 강여옥 님께서 이 구역 출입을 엄격히 관리하고 있어서, 함부로 조사할 수 없습니다." 강여옥. 큰어머니라는 사람. 아직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름만 몇 번 들었을 뿐인데도, 그 이름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진다는 건 눈치챘다. "왜 그분이 그 구역을 관리해요." 서은은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 짧은 망설임 속에 이미 많은 게 담겨 있었다. "선우강철 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좋지 않은 감정이라니, 어느 정도로요?" "그건 저도 알아낸 게 없습니다. 그저 그 구역 근처에서 그분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조심하라는 말을 이렇게 여러 번 듣다 보니, 이제는 조심하지 말라는 말이 더 무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 다음 날, 나는 우연히 강여옥과 마주쳤다. 정원 한쪽,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그늘진 곳이었다. 원래는 그쪽으로 갈 생각이 없었다. 그냥 산책하듯 걷다가, 나무들이 유난히 촘촘한 구역을 지나게 됐을 뿐이었다. 발이 알아서 그쪽으로 향했다고 해야 할까. 처음에는 정원사와 이야기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상대는 낯익은 실루엣이 아니었다. 키가 크고, 귀가 유난히 긴 남자였다. 인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이질적인 인상. 옷차림도 이 저택 사람들과는 결이 달랐다. 딱 봐도 이 동네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낮게 오갔다. 나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그쪽을 살폈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또 들켰다가는 홍련에게 진짜 혼날 텐데. "……도현이라는 아이는 아직 아무것도 모릅니다." 강여옥의 목소리였다. 차갑고 낮았다. 내 이름이 저 입에서 나오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모르는 게 오히려 편할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테니까요." 남자의 대답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여유로운 웃음. 저게 무슨 웃음인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듯이 웃는 소리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을 죽였다. 강여옥과 저 남자가, 뭔가로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시경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시경의 사람이거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시경 쪽 사람이 왜 이 저택 안까지 들어와 있는 걸까. 강여옥이 시경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 방향으로 생각하면 지금까지 이상했던 몇 가지가 설명이 되는 것 같았다. 왜 그 구역 출입을 그렇게 엄격히 막았는지도. 두 사람의 대화가 계속됐지만, 그때 마침 낙엽이 발밑에서 부서졌다. 아주 작은 소리였는데, 강여옥의 시선이 즉시 내가 숨은 방향으로 꽂혔다. 숨이 턱 막혔다. 도망칠 시간도 없었다. 저 눈이 나무 뒤까지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