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강서윤 시점]
차창에 이마를 대자 유리가 뜨겁게 느껴졌다. 아니, 유리는 그대로였다. 뜨거운 건 나였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이 눈앞에서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뭉개졌다. 마치 누군가 필름을 손으로 잡고 억지로 늘여놓은 것 같았다. 나는 그 불빛의 궤적을 눈으로 좇으려 했지만, 초점이 자꾸 어긋났다.
"서윤아."
엄마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귀에 물이 찬 것처럼 먹먹했고, 시야 가장자리가 검게 번져 들어왔다. 손끝은 저릿저릿했고, 심장은 미친 듯이 두드려대다가 갑자기 뚝, 느려지기를 반복했다. 그 리듬이 너무 불규칙해서, 나는 내 심장이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라울 지경이었다.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졌어. 여보, 차 좀 세워봐요."
엄마가 내 뺨을 짚었다. 손바닥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차가움조차 통증처럼 느껴질 만큼 내 몸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엄마의 손이 닿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 냉기가 얼굴 전체로 퍼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마치 내 몸에 남아 있던 열기와 엄마의 손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사포로 목구멍을 문지른 것 같았다. 아니, 이건 괜찮은 게 아니었다. 나조차도 알 수 있었다. 이건 그냥 체한 것도, 긴장한 것도 아니었다. 체했을 때 느껴지는 답답함과는 완전히 다른,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아버지가 차를 세웠다. 급브레이크에 몸이 앞으로 쏠렸고, 그 순간 위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감각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안전벨트가 어깨를 파고드는 감각조차 멀게 느껴졌다.
"병원으로 가야겠어."
아버지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평소의 그 냉정하고 사업가다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 떨림 속에서 처음으로 아버지가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업 얘기를 할 때도, 임원들 앞에서 소리를 지를 때도 흔들리지 않던 그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 나 하나 때문에 갈라지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아주 크게.
그 레스토랑에서 마신 음료 한 잔. 이도현이 직접 따라준 그 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 남자가 웨이터에게 뭔가를 건네는 걸 본 것 같았는데, 그때는 그냥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피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짧은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이도현이 아주 자연스럽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웨이터의 손에 작은 병을 쥐여주던 그 손짓. 손목을 꺾는 각도, 손가락이 접히는 속도, 웨이터가 그것을 받아 들고 아무 표정 없이 주방 쪽으로 사라지던 뒷모습까지. 그 모든 게 지금에서야 하나의 그림처럼 완성되고 있었다.
설마.
설마, 그게 내 음료였을까.
"서윤아, 정신 차려. 눈 떠봐."
엄마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이 마치 남의 것인 양 무겁게 내려앉았다. 세상이 흔들리고, 소리가 늘어졌다. 엄마의 얼굴이 눈앞에서 두 개, 세 개로 겹쳐 보이다가 다시 하나로 돌아왔다. 나는 그 순간, 이대로 눈을 감으면 다시는 못 뜰 것 같다는 원초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억지로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의 기억은 조각조각 끊겨 있었다. 링거 바늘이 팔에 꽂히는 순간의 따가움, 의사가 뭔가를 묻는 목소리, 엄마의 울음 섞인 대답. 체온이 40도를 넘었다는 말과, 원인을 알 수 없는 알레르기 반응일 수도 있다는 말이 흐릿하게 들려왔다.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발소리, 커튼이 젖혀지고 닫히는 소리, 어딘가에서 울리는 모니터 알람 소리까지 전부 뒤섞여서 하나의 소음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없다니.
나는 알 것 같았다. 정확히는 몰라도, 누구 때문인지는 알 것 같았다.
몇 시간이 지나고 열이 조금 내려간 뒤, 나는 병실 침대에 반쯤 기대앉아 있었다. 엄마는 밖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아버지는 전화를 받으러 나간 상태였다. 나는 혼자였다.
병실은 조용했다. 창밖으로는 도심의 불빛이 멀리 흐릿하게 번져 있었고, 링거 폴대에 매달린 수액 봉투가 아주 천천히, 규칙적으로 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 소리를 세고 있으면 조금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하나, 둘, 셋. 나는 숫자를 세면서 이 모든 게 그냥 나쁜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손끝이 여전히 저린 채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몸이 좀 안 좋다고 들었는데."
그 목소리. 낮고 차분하지만 조롱이 섞인, 그 특유의 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렸다. 이번엔 약물 때문이 아니었다.
"당신이야?"
내 목소리가 떨렸다. 부정할 수 없는 확신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손이 휴대폰을 쥔 채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뭘 했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질문이 틀렸는데."
이도현이 낮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흘러들어와 내 귓속에서 얼음처럼 박혔다.
"질문은 '무슨 짓을 했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냐'가 되어야지."
나는 숨을 삼켰다. 목구멍 안쪽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살 수 있냐고?"
"응급실에서 아무리 검사해도 답이 안 나올 거야. 그건 병원 검사로 잡히는 물질이 아니거든. 정확히 말하면, 잡힐 수는 있는데, 시간이 걸려. 문제는 그 시간이 네 몸이 버틸 수 있는 시간보다 길 수도 있다는 거지."
피가 얼어붙었다. 정말로, 실제로 그런 감각이 있었다. 몸속 어딘가에서부터 서늘한 것이 번져나가는. 그 서늘함은 마치 얼음물이 혈관을 타고 도는 것 같았다. 링거가 꽂힌 팔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뭘 원해."
내 목소리는 이제 애원에 가까웠다. 그게 싫었다. 이 남자 앞에서 이런 목소리를 내는 게 견딜 수 없이 싫었다. 나는 강서윤이었다. 지금까지 누구 앞에서도 이렇게 목소리를 떨어본 적이 없었다.
"만나서 얘기해."
"싫어. 여기로 와서 그 약이 뭔지 말해. 아니면 지금 당장 경찰에 신고할 거야."
"신고해봐."
그 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이미 그 상황까지 다 계산해둔 사람처럼, 태연했다.
"네가 신고하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뭘 봤는지도 같이 알려지겠지. 서윤아, 넌 서한고 미녀 3인방인가 뭔가로 유명하잖아. 재벌 딸이 맞선 자리에서 약물에 취해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이야기가 도는 게 좋겠어, 아니면 조용히 이 문제를 나랑 해결하는 게 좋겠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구멍이 사포처럼 껄끄러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벌써 상상이 됐다. 학교 게시판에, SNS에 내 이름이 오르내리는 광경. 아버지 회사의 주가가 흔들리는 뉴스 헤드라인. 엄마가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
"내일 오후에, 네가 아는 곳으로 갈게. 병원에서 조용히 나와."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해."
목소리에 힘을 실어보려 했지만, 이미 스스로도 그 힘이 얼마나 얇은지 알고 있었다.
"들어야지. 안 그러면 넌 이 열이 다시 오를 때, 그다음엔 안 내려갈 수도 있으니까."
전화가 끊겼다.
나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창밖으로 병원 복도의 형광등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엄마가 다시 병실로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앉아 있었다.
엄마가 다가와 이불을 다시 덮어주며 뭐라고 말을 걸었던 것 같은데, 나는 대답을 하는 건지도 모른 채 고개만 끄덕였던 것 같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은 온통 방금 들은 그 목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남자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내가 이 상황에서 뭘 두려워하는지, 어떤 약점을 쥐고 있으면 내가 흔들릴지. 소문. 평판. 아버지 회사의 이미지. 미녀 3인방이라는 그 우스운 별명조차, 그 남자는 정확히 어디를 찔러야 아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이도현은 나를 아주 오래전부터, 아주 자세히 지켜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 생각이 들자, 몸속에 남아 있던 열기와는 다른 종류의 서늘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심의 불빛들이 여전히 흐릿하게 번져 있었고, 그 사이 어딘가에 지금도 이도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태연하게 다른 일을 하고 있을 그 얼굴이 눈앞에 그려졌다. 웨이터에게 작은 병을 건네던 그 손짓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상상하며 웃고 있을지도 몰랐다.
수액이 다시 한 방울, 뚝, 떨어졌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내일 오후, 내가 어디로 나가야 할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서,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정말로 그 남자를 만나러 갈 수밖에 없는 걸까.
아니면, 이미 그 남자의 손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 걸까.
병실 문 밖에서 엄마와 의사가 나누는 낮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버지의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이불 속으로 밀어 넣으며, 방금 들은 그 목소리를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이, 몸속의 열보다 더 나를 옥죄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