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옥상 철조망이 손끝에 걸렸다.
차가웠다.
녹슨 자리가 살을 콕콕 찔렀다.
바람이 등을 밀어냈다.
한 번, 두 번, 마치 어서 가라고 부추기는 것처럼.
발밑으로 운동장이 멀게 보였다.
축구공이 튀는 소리, 누가 웃는 소리가 났다.
아주 먼 곳에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세상은 참 태평하다.
나만 여기 매달려 있는데.
숨이 잘 안 쉬어졌다.
가슴이 꾹, 눌리는 느낌이었다.
누가 발로 밟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7년이 걸렸다.
그 생각을 하니까 웃음이 났다.
정말 웃겨서, 웃음이 났다.
7년.
2555일쯤 될 텐데, 계산할 힘도 없었다.
이걸 위해서 버텼나.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놓았어야 했나.
손끝이 떨렸다.
난간을 붙잡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관절이 아플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손은 나를 붙잡는 손이 아니라 밀어내려는 손 같았다.
-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7년 전, 그 여자애의 목소리였다.
분명히 열 살짜리 목소리였는데, 지금 들으니 어른보다 더 크게 울렸다.
***
7년 전, 나는 열 살이었다.
동네 공원, 낡은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벤치 나무판은 오래돼서 표면이 거칠거칠했고, 앉으면 엉덩이가 배기는 자리였다.
그래도 우리는 항상 거기 앉았다.
그 옆에 윤소민이 있었다.
윤소민은 밝은 갈색 머리에 분홍 리본을 매고 있었다.
그날도 리본이 바람에 살랑였다.
그 리본 끝이 내 팔을 스칠 때마다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던 기억이 난다.
"도현아."
소민이 내 새끼손가락을 잡았다.
작고 따뜻한 손이었다.
손가락 끝에 물감이 살짝 묻어 있었다. 그날 미술 시간이 있었으니까.
"우리 고등학교까지 계속 같이 있으면... 그때는 사귀어줄게."
소민이 웃으면서 말했다.
"진짜?"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던 것 같다.
"응, 진짜. 약속."
소민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 흔들림에 맞춰 내 심장도 같이 흔들렸던 것 같다.
그날부터 나는 그 약속을 믿었다.
믿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 몰랐다.
그때는 정말, 약속이라는 게 절대 깨지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 나는 소민의 가방을 들었다.
가방이 무거워 보이면 굳이 먼저 뛰어가서 낚아채듯 들었다.
비 오는 날엔 소민의 우산이 되었다.
내 어깨 반쪽은 항상 젖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급식실에서는 항상 소민의 자리를 맡아두었다.
누가 그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괜히 눈을 부라리기도 했다.
시험 기간엔 밤새 소민의 노트를 정리해줬다.
글씨가 삐뚤빼뚤해서 다시 옮겨 쓰느라 밤을 꼴딱 새운 날도 있었다.
친구들이 물었다.
"넌 소민이 애인이야, 몸종이야?"
나는 그냥 웃었다.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약속이 있었으니까.
약속이 있는데 뭘 더 설명해야 하나, 그런 마음이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그랬다.
소민이 다른 애랑 다투면 내가 먼저 나서서 편을 들었다.
소민이 좋아하는 아이돌 콘서트 표를 구하려고 새벽부터 줄을 섰다.
소민이 감기에 걸리면 죽을 사서 교실 뒷문으로 몰래 넣어줬다.
친구들은 점점 말을 안 했다.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7년이었다.
7년 동안 나는 그 약속 하나를 붙들고 있었다.
다른 건 다 놓쳐도, 그거 하나는 놓을 수 없었다.
성적이 떨어져도, 다른 친구들이 멀어져도, 그 약속만 있으면 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
바람이 다시 불었다.
난간 아래, 운동장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잘 들리지 않았다.
그냥 웅웅거리는 소음처럼 느껴졌다.
이제 그 약속은 끝났다.
오늘, 발렌타인데이에.
발끝이 허공에 걸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몇 시간 전, 중앙정원에서 봤던 장면이 눈앞에 다시 떠올랐다.
소민이 다른 남자애한테 초콜릿을 건네고 있었다.
얼굴이 발그레한 채로, 그 애 손을 잡고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봤다.
- "야, 너 왜 그래?"
친구가 어깨를 툭 쳤을 때도 나는 대답을 못했다.
목이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왜 이렇게 됐을까.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던 걸까.
- "너 나 좋아하잖아. 근데 왜 말을 안 해?"
언젠가 소민이 장난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웃기만 했다.
말할 수 없었다.
말하면, 그 약속이 깨질까 봐.
정말 바보 같았다.
약속이 있으니까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말하는 게 무서워서 약속 뒤에 숨어있었던 거였다.
이제야 알았다.
약속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걸.
나 혼자 만들어서, 나 혼자 지키고 있었던 거였다.
소민은 아마 그 약속 자체를 기억도 못 했을 거다.
열 살 때 장난처럼 한 말이었을 텐데, 나만 그걸 7년 동안 성경책처럼 붙들고 있었던 거다.
우습다.
정말 우스운데, 눈물이 났다.
손끝에 힘이 풀리려는 순간, 뒤에서 옥상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딸깍.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끝에 힘을 뺐다.
바람이 몸을 밀었다.
난간을 잡은 손가락이, 하나씩 풀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