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몇 시간 전.
발렌타인데이였다.
학교 중앙정원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소민에게 줄 초콜릿을 손에 쥐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직접 만든 초콜릿이었다.
어제 밤새 세 번이나 태워서 겨우 완성한 거였다.
포장지는 마트에서 제일 흔한 걸 골랐다.
너무 화려하면 부담스러울까 봐.
너무 초라하면 성의 없어 보일까 봐.
그 중간을 찾겠다고 편의점을 세 군데나 돌았다.
서툴렀지만, 나름 최선을 다했다.
손끝이 계속 초콜릿 상자 모서리를 눌렀다.
꾹, 꾹.
심장이 그 리듬에 맞춰 뛰는 것 같았다.
이게 맞나.
아니야, 맞아.
7년을 기다렸으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그런데 그 자리에 차현우가 먼저 와 있었다.
차현우는 축구부 스타였다.
탈색한 머리가 정원 조명 아래 반짝거렸다.
키가 크고, 웃을 때마다 사람들이 다 같이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늘 신기했다.
뭐가 저렇게 웃긴가.
근데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아서, 그게 더 짜증났다.
"소민아, 나랑 사귀자."
차현우가 큰 소리로 말했다.
장미 한 다발을 내밀면서.
주위에서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누군가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전부 웃고 있었다.
나만 웃지 못했다.
소민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응, 좋아!"
소민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 짧은 두 마디가 귀에 박혔다.
응, 좋아.
그 목소리가 어제 나한테 "고마워, 도현아"라고 했던 목소리랑 똑같았다.
같은 입에서 나온 말인데, 왜 이렇게 다르게 들리는 걸까.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손에 쥔 초콜릿이 녹아서 흘렀다.
포장지 틈으로 갈색 액체가 스며 나왔다.
손바닥이 끈적해졌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다.
박수 소리, 웃음 소리, 누군가의 카메라 셔터음.
그 모든 소리 속에서 나는 투명 인간이었다.
7년.
7년 동안 나는 뭘 한 걸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소민의 짝이 되고 싶어서 일부러 지각을 노려 빈자리를 찾았던 것도.
소민이 좋아하는 캐릭터 필통을 사려고 용돈을 모았던 것도.
소민이 아프다고 하면 학교 끝나고 죽을 사다 준 것도.
전부 다, 이 순간을 위한 거였던가.
- "우리 고등학교까지 계속 같이 있으면... 그때는 사귀어줄게."
그 약속이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바보 같은 새끼손가락 약속.
열 살, 동네 공원 벤치에서 했던 약속.
나는 그걸 진짜로 믿었다.
7년 동안, 진짜로.
소민이 차현우 품에 안겨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나를 향한 적은, 어쩌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착각이었나.
아니, 착각이 아니었어. 분명 나한테도 웃어줬었잖아.
근데 저 웃음이랑은 달랐던 거였나.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엉켰다.
아무 생각도 정리가 안 됐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뒷걸음질쳤다.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야, 비켜봐."
그게 다였다.
***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뚝뚝 끊겼다.
복도를 걸었다.
계단을 올랐다.
발끝이 자꾸 헛디뎌졌다.
몇 층을 올라왔는지도 몰랐다.
그냥 위로, 위로 올라갔다.
누군가에게서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지나가던 애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저 새끼 왜 저래?"
누군가 그렇게 말한 것도 같았다.
내 얼굴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나도 몰랐다.
웃고 있었을까.
울고 있었을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옥상 문이 열려 있었다.
누군가 잠금장치를 고쳐놓지 않은 모양이었다.
운이 좋았던 걸까, 나빴던 걸까.
문을 밀자 삐걱, 소리가 났다.
바깥 공기가 확 밀려들었다.
2월의 찬 바람이었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난간을 붙잡았다.
손이 떨렸다.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초콜릿이 녹아 붙어 있던 손바닥도 그새 차가워졌다.
여기서 놓으면, 다 끝난다.
그 생각이 오히려 편안했다.
이상하게 눈물이 안 났다.
그냥 웃음만 났다.
하, 이게 뭐라고.
7년 짝사랑 하나 끝났다고 옥상까지 올라온 내가 진짜 우습다.
근데 그 생각을 하면서도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 "도현아, 넌 착한 애야."
소민이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착한 애.
그 말이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
착한 애.
숙제 대신 해주는 애.
심부름 시키기 좋은 애.
불러내면 언제든 나오는 애.
나는 착한 애가 아니라, 그냥 쓸모 있는 애였을 뿐이었다.
목 안쪽이 조여왔다.
숨이 잘 안 쉬어졌다.
발을 헛디뎠다.
아니, 헛디딘 게 아니라 스스로 힘을 뺐다.
몸이 기울었다.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시야가 하늘로 넘어갔다.
구름이 이상하게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잡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터졌다.
손목이 확 잡혔다.
살갗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그 통증이 오히려 낯설게 반가웠다.
아, 나 아직 살아있구나.
세상이 빙그르르 돌았다.
누구야.
이 손, 누구 손이야.
시야가 흔들리는 사이로 누군가의 얼굴이 스쳤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근데 누군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뒤로 확 끌려갔다.
등이 바닥에 닿았다.
숨이 턱, 막혔다.
머리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