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푸른 고양이가 깨운 검

2화

숲으로 들어선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마저 어딘가 무거웠다. 습기 찬 바람 속에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피 냄새였다. 그것도 꽤 진한 피 냄새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 낙엽이 바스락거릴 때마다 숨을 죽였다. 혹시나 짐승이 놀라 도망이라도 치면, 이 냄새의 정체를 영영 알 수 없을 테니까. 덤불 사이, 몸통보다 큰 상처를 입은 짐승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푸른빛이 도는 털. 고양이였다. 크기만 놓고 보면 어른 팔뚝만 한, 제법 덩치가 있는 놈이었다. 다만 눈동자만은 고양이의 것이 아니었다. 깊고, 오래되고, 뭔가를 다 알고 있는 듯한 눈이었다. 짐승의 눈이라기엔 지나치게 인간적이었다. 나는 그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손이 저절로 검 자루로 향했다. "...너, 뭐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고양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나를 관찰하듯 훑어보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호오. 이 몸이 보이는 놈이라니.]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짐승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는데, 목소리는 분명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놀랄 것 없다. 나는 곽막강이다. 세간에서는 청묘라 부르지.] "곽막강...?" 귀동냥으로만 들어왔던 이름이었다. 오천 년 후 세상에서도 전설처럼 전해지던, 신수급 존재. 산신을 논할 때 반드시 함께 거론되는 이름 중 하나였다. 이 정도 존재를, 이런 야산 덤불 속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이 몸이 지금 이 꼴이 된 건 좀 사연이 있다만.] 청묘가 앞발을 핥으며 말했다. 상처투성이인 주제에 태연하게 그루밍을 하는 모습이 어딘가 우스웠다. [네놈 안에 있는 그 힘. 봉심의 잔재.] "...느껴지나." [느껴지지 않으면 이상한 거지. 그렇게 큰 걸 담고도 몸이 이 모양인 걸 보니, 너도 참 딱하구나.] 나는 말문이 막혔다. 초면에 이렇게까지 정곡을 찌르는 놈은 처음이었다. "그쪽도 몸이 그 모양이면서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닌 것 같소만." [말은 청산유수구나.] 청묘가 콧방귀를 뀌듯 코를 씰룩였다. [거래를 하자.] 청묘의 눈이 반짝였다. [이 몸은 지금 힘을 크게 잃었다. 혼자서는 회복이 요원해. 네놈과 영혼을 엮으면 서로 살길이 열릴 거다.] "엮는다는 게 정확히 뭔가." [신혼 융합. 영혼 차원에서 하나가 되는 거지.] 나는 잠시 생각했다. 손해 볼 건 없어 보였다. 다만, 처음 보는 존재와 영혼을 엮는다는 게 말처럼 간단할 리 없었다. "조건이 있소." [또 뭐냐.] "위험한 부작용은 없어야 하오." 청묘가 피식 웃는 듯한 소리를 냈다. [걱정 마라. 이 몸이 죽으면 네놈도 같이 죽는 거니, 최선을 다할 수밖에.] 그 말이 오히려 안심이 됐다. "하나 더." [...뭐냐, 아직도 있단 말이냐.] "이 몸 다 나으면, 그동안 밥값은 그쪽이 대는 거요?" 청묘의 눈이 잠시 멈췄다. [...] 침묵이 흘렀다. 숲 속의 바람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네놈,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걸 물을 정신이 있단 말이냐.] "정신이 있으니까 묻는 거요. 나도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니오." 청묘가 앞발로 제 이마를 짚는 시늉을 했다. 고양이 얼굴에 그런 표정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알겠다, 알겠어. 밥이든 뭐든, 이 몸이 힘을 되찾으면 얼마든지 대주마.] 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청묘의 몸에서 푸른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우웅. 낮고 묵직한 진동이 온몸을 관통했다. 빛이 점점 짙어지더니, 실처럼 가늘게 뻗어 나와 내 가슴을 향해 다가왔다. 빛이 내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막혀 있던 기맥 사이로 뜨거운 무언가가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숨이 턱, 막혔다. 전신의 혈맥이 뜨거운 쇳물을 부은 듯 들끓었다. 오천 년 후 감각이, 봉심 경지의 무도가. 한꺼번에 되살아나고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들어 가는 감각. 동시에 몸 깊숙한 곳에서,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낯선 존재감이 함께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것이 신혼 융합이라는 것인가. 의식이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나는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제 이 몸은, 온전히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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