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여의도공원의 분수는 저녁 여섯 시가 되면 정확히 물줄기를 뿜어 올렸는데, 한서아는 그 물기둥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순간을 기다리며 벤치 끝자락에 앉아 있는 것이 이미 몸에 새겨진 습관처럼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열일곱 달, 오백일이 넘는 시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믿기 어려울 때가 있었지만, 목에 걸어둔 다이아몬드 반지—너무 커서 손가락 대신 목걸이에 꿰어 걸고 다니는—를 손끝으로 매만지는 순간마다 그녀는 다시 그 여름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라일락과 장미가 뒤섞인 냄새, 그리고 그의 손등에서 나던 비누 냄새 같은 것들이.
처음 몇 달간은 그저 우연이라 여겼다. 퇴근길이 원래 이쪽이었으니까, 소율을 데리러 가는 길에 공원을 가로지르는 게 자연스러운 동선이었으니까, 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러나 계절이 두 번 바뀌고 세 번 바뀌어도 벤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 보면서 서아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기다림이라는 걸. 퇴근길에 굳이 이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 이유를 동생 한소율의 어린이집 선생님이 지나가듯 물었을 때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냥 웃어넘긴 적이 여러 번이었는데, 사실 이유는 단 하나, 이도현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 때문이었다.
"여기서 기다려줘. 돌아올 테니까."
그 말을 들었을 때 서아는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약속인지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고, 그날 이후 분수 앞의 벤치는 그녀에게 유일한 종교가 되어버렸다. 매일 여섯 시, 물줄기가 솟아오르는 그 순간에 맞춰 벤치에 앉는 것이 하나의 의식이 되었고, 그 의식이 끝나야만 하루가 진짜로 끝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이상하게 볼지도 몰랐다. 스물아홉의 여자가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벤치에 앉아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게 얼마나 미련해 보이는지 서아 자신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목에 걸린 반지의 무게가, 손끝에 닿는 그 차가운 감촉이 매번 그녀를 다시 이 자리로 끌어당겼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물줄기가 솟아오르고, 아이들 몇이 손을 뻗어 물방울을 잡으려 뛰어다니고, 노을이 한강 쪽으로 붉게 번지는 풍경 속에서 서아는 핸드폰 화면을 켜서 시간을 확인했다. 여섯 시 십칠 분. 이제 슬슬 소율을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가야 했으나, 몸이 좀처럼 벤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조금만 더 앉아 있으면 그가 걸어올 것 같은 착각, 열일곱 달간 매일 반복해온 그 어리석은 기대가 오늘도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서아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내가 왜 이러지. 이제 그만해도 되는데. 소율이 저녁을 굶고 기다리고 있을 텐데, 왜 오늘도 오 분, 십 분씩 이 자리에 앉아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지. 그러나 대답은 늘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 오늘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미련한 희망. 그 희망이 매일 배신당했음에도 서아는 다음 날 다시 같은 자리에 앉았다. 마치 신도가 매일 같은 시간에 기도를 올리듯, 믿음이 사라진 후에도 습관만은 남아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처럼.
바람이 불어 물기둥이 옆으로 살짝 휘어졌다가 다시 곧게 솟아올랐다. 서아는 목에 걸린 반지를 손끝으로 한 번 더 쥐어보았다. 차가웠다. 늘 그랬다. 이 반지가 따뜻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이걸 손에 끼워주던 그 여름밤, 손끝이 스치던 순간에만 잠깐 온기가 돌았을 뿐, 그 이후로는 늘 이렇게 차가운 채로 그녀의 목에 매달려 있었다.
그때, 분수 저편 산책로에서 걸어오는 한 남자의 실루엣이 노을빛을 등지고 서 있는 것을 서아는 무심코 눈으로 좇았다. 큰 키와 넓은 어깨, 군더더기 없이 곧은 걸음걸이가 낯설지 않아서 심장이 먼저 반응했는데, 서아는 그것을 애써 착각이라 치부하려 했다. 열일곱 달 동안 수백 번, 수천 번 겪었던 그 헛것이겠거니 하고. 비슷한 체형의 남자만 보아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던 게 몇 번이었던가. 지하철역에서, 카페 앞에서, 회사 로비에서. 그럴 때마다 서아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미쳤네, 진짜. 죽은 사람도 아니고 살아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이렇게 매번 찾아 헤매다니.
그러나 남자가 가까워질수록 노을빛 사이로 드러나는 이목구비가, 조각처럼 정갈한 콧날과 다부진 턱선이 점점 선명해졌고, 서아는 벤치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 채 숨을 죽였다. 걸음걸이 하나, 어깨를 늘어뜨리는 방식 하나까지도 낯설지 않았다. 아니, 낯설지 않은 게 아니라 너무나도 익숙했다.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각과 함께, 손끝이 먼저 차갑게 식어갔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로 서아는 그 실루엣을 눈으로 붙잡았다.
이럴 리 없는데. 이건 또 헛것일 텐데. 그렇게 되뇌면서도 다리가 저절로 벤치에서 완전히 떨어져 일어섰다. 노을은 여전히 붉었고, 분수의 물기둥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그 모든 평범한 풍경 속에서 오직 그 남자의 실루엣만이 비현실적으로 선명했다.
남자는 몇 걸음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아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낮게 입을 열었다.
"오래 기다렸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서아의 세상이 통째로 멈춰버렸다. 열일곱 달 동안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던 그 목소리, 라일락 냄새 나던 여름밤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그 낮은 음성이 지금 이 순간, 노을이 지는 여의도공원 한복판에서 그대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서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한 채, 그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사람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