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오빠, 왜 이제 왔어요?

2화

서아는 벤치에서 완전히 일어난 채로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하마터면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는데,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이도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몇 초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저녁 공원의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시각이었고,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주황빛이 그의 얼굴에 얼룩덜룩한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는데, 그 흔들리는 빛 아래에서도 그가 이도현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떠나던 날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라진, 조금 더 마른 듯하면서도 오히려 더 단단해진 몸의 윤곽과, 짧게 자른 머리 아래로 드러난 관자놀이의 그림자가 낯설게 느껴졌지만, 그 눈빛만은 여름밤 공원 벤치에서 처음 마주쳤던 그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 서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군복 대신 걸친 회색 셔츠와 그 사이로 드러난 팔뚝의 힘줄이, 열일곱 달 전 그녀가 배웅했던 청년과는 또 다른 사람처럼 낯설었으나, 정작 그 낯섦을 압도하는 것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저 눈빛이었다. "……도현씨?" 겨우 뱉어낸 목소리가 스스로도 낯설 정도로 떨렸다.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뭔가가 뜨겁게 치받쳐 올라, 말을 잇기도 전에 눈시울이 시큰거리는 것을 서아는 애써 참아냈다. 도현은 그 물음에 대답 대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되물었다. "도현씨? 예전엔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나." 상대의 말을 그대로 되받는 그 화법이, 여유가 넘치는 그 톤이 오히려 서아의 가슴을 더 후벼 파고들었다. 마치 어제 헤어졌다가 오늘 다시 만난 사람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웃는 그 얼굴 앞에서, 서아는 순간 자신이 겪었던 시간들이 전부 부정당하는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열일곱 달 동안 밤마다 그를 그리워하며 흘린 눈물과, 편지 한 장 오지 않았던 그 침묵의 시간들이 한꺼번에 밀려 올라와 목구멍을 틀어막는 듯했다. 휴가 나온 동기들의 손을 빌려 안부라도 전해오던 다른 여자들의 남자친구들과는 달리, 도현은 처음 몇 달을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었고, 그 침묵의 밑바닥에서 서아는 혼자 소율을 돌보며 밤을 버텨야 했었다. 그 모든 새벽들이, 그 모든 참았던 울음들이 지금 이 순간 한꺼번에 되돌아와 그녀의 두 손을 떨게 만들었다. 서아는 반사적으로 팔짱을 끼며 한 발 물러섰다. "연락도 없이 이렇게 나타나면, 나더러 뭐라고 반응하라는 거예요?" 존댓말과 반말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억눌러왔던 감정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목소리는 날카로웠으나 그 끝이 미세하게 갈라졌고, 팔짱을 낀 손끝이 자신도 모르게 팔뚝을 꾹 움켜쥐고 있었다. 도현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피더니, 표정에는 변화가 거의 없이 다만 눈빛만이 조금 가라앉았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옆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며 조각 같은 콧날의 능선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는데, 그 정갈한 옆모습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서아는 명치가 꽉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역했다." 짧고 단정적인 그 말이 오히려 서아를 더 얼어붙게 만들었다. 전역이라니. 그렇다면 최소한 몇 주 전부터 알고 있었을 텐데, 왜 하루도, 단 하루도 미리 알려주지 않았는지. 서아의 머릿속에서는 순식간에 지난 며칠, 지난 몇 달의 조용했던 저녁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 연락도 없이 지나갔던 그 밤들 속에서, 그는 이미 전역 날짜를 세고 있었을 것이었다. 서아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물었다. "언제 전역했는데요." "보름 됐어." 보름. 보름 동안 그는 어디에 있었으며, 왜 하필 지금, 예고 없이 이곳에 나타났는지. 그 보름이라는 시간이 서아에게는 마치 낯선 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숫자처럼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보름이면 마음만 먹었다면 전화 한 통, 문자 한 줄이라도 남길 수 있었을 시간이었는데. 서아의 머릿속에서 온갖 물음들이 뒤엉켰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손끝으로 목에 걸린 반지를 무의식중에 매만지고 있었는데, 그 반지는 그가 떠나기 전 마지막 밤에 손수 걸어주었던 것으로, 서아는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그것을 빼놓지 않았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도현의 시선이 그 손끝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그녀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스치는 감정—안도인지, 회한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확인하기도 전에, 그 눈빛은 다시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가 있었고, 서아는 자신이 방금 본 것이 착각이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졌다. '……저 사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저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어린이집에서 데리러 오지 않는다며 혼자 걸어온 한소율이 두 사람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작은 가방을 등에 메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그 모습에 서아는 순간 안도와 당혹이 동시에 밀려들었는데,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나타난 소율이 반가우면서도 원망스러웠다. 소율은 도현의 얼굴을 알아본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걸음을 멈췄다. 몇 걸음 앞에서 우뚝 서서 도현의 얼굴과 서아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던 소율의 표정이, 곧 반가움으로 활짝 피어올랐다. "어? 언니 애인 아저씨다!" 그 순진한 외침이 공원의 저녁 공기를 가르며 퍼졌고, 근처를 지나던 산책객 몇이 슬쩍 시선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서아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소율의 입을 막으려 황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도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짙어진 것을, 서아는 애써 못 본 척하며 소율의 어깨를 잡아 끌었다. "소율아,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작게 속삭이듯 나무랐지만 목소리에는 이미 힘이 빠져 있었다. 소율은 서아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도현의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저씨, 어디 갔었어요? 오래 안 보였잖아요." 그 단순한 물음이, 서아가 목구멍 안쪽에서 몇 번이나 삼켜냈던 그 질문을, 어린아이의 입을 통해 너무도 쉽게 밖으로 꺼내놓았다. 도현은 잠시 서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소율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대답했다. "멀리, 좀." 너무도 간단한 그 대답에, 서아는 다시 한번 속에서 뭔가가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멀리, 좀이라니. 열일곱 달의 기다림을 그렇게 세 글자로 뭉개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태연함이, 이 순간에도 서아의 가슴을 조여왔다. 그리고 그 조여오는 감각 한편에서, 서아는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함께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이 알아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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