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오빠, 왜 이제 왔어요?

5화

다음 날부터 서아는 평소보다 더 완강하게 일상을 지켜내려 했는데, 출근길에는 이어폰 볼륨을 한껏 높여 바깥세상의 소리를 아예 차단해버렸고, 지하철 안에서도 괜히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보며 창밖으로 스치는 익숙한 풍경들을 애써 외면했다. 퇴근길에는 아예 다른 골목으로 돌아 분수 앞을 지나지 않으려 애썼는데, 평소보다 십 분이나 더 걸리는 그 길을 택하면서도 스스로에게는 그저 운동 삼아 멀리 걷는 것뿐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열일곱 달간 몸에 새겨진 습관은 하루아침에 지워지지 않았고, 발걸음이라는 게 머리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걸 서아는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셋째 날 저녁,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다시 그 벤치 근처를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가로등 불빛 아래 벤치는 여느 때처럼 조용히 놓여 있었고, 그 앞을 지나치는 순간 심장이 이상하게 쿵, 내려앉는 감각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러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면서 발은 왜 자꾸 이쪽으로 오는 거야.' 서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애꿎은 가방끈만 움켜쥐었다. 나만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는 걸까, 저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잘 지내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자 명치 어딘가가 답답하게 조여왔고, 그녀는 괜히 걸음을 빨리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 그녀의 신경전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현은 그날 오후 예고 없이 어머니 한미경의 꽃집에 들러 있었다. 유리문에 걸린 종이 딸랑, 소리를 내며 열렸을 때 서아는 별생각 없이 가게로 들어섰는데, 카운터 앞에 서서 장미 한 다발을 조용히 고르고 있던 그의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감각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도현은 늘 그렇듯 조각처럼 정갈한 옆얼굴로 붉은 장미 몇 송이를 매만지고 있었는데, 가게 안의 은은한 조명이 그의 콧날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어, 도현씨." 미경이 먼저 반갑게 말을 걸며 상황을 자연스럽게 풀어놓았다. 그 익숙한 말투에 서아는 눈을 크게 떴는데, 어머니가 도현을 이토록 편하게 대하는 모습이 낯설어서였다. 언제부터, 얼마나 자주 이런 식으로 안부를 주고받았던 걸까. "마침 잘 왔다, 서아야. 도현씨가 소율이 준다고 조그만 화분을 골라줬는데 네가 좀 봐줘." 미경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던지고는 다시 계산대로 돌아가 버렸고, 서아는 그 뒷모습을 향해 뭐라 따지고 싶었지만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도현은 그 틈을 타 조그만 다육식물 화분을 서아 앞으로 슬쩍 내밀었다. 작은 토분 위에는 하얀 리본이 야무지게 매여 있었고, 잎사귀 끝에 물방울이 아직 마르지 않은 채 반짝이고 있었다. "소율이가 좋아할 것 같아서." 짧은 그 말 한마디에 서아의 방어벽이 미세하게 흔들렸는데, 화분을 받아 들지 않으려 손을 뒤로 물리면서도 시선은 화분 위 작은 리본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저런 걸 언제 또 신경 써서 골라온 걸까, 소율이가 다육식물을 좋아한다는 건 또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 알고 싶지 않은데 자꾸 궁금해지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이런 거 안 받아요."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손끝은 이미 화분 가장자리를 만지고 있었다. 도현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낮게 웃으며 말했다. "받기 싫으면 소율이한테 직접 줄게. 걔는 좋아할 것 같은데." 여유로운 말투에 서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고, 그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말을 그대로 되받아치며 상황을 뒤집어버리는 게 낯설지 않아서 더 화가 났다. 예전에도 늘 이랬지, 내가 아무리 밀어내도 결국 자기 뜻대로 만들어버리는 사람. 그 순간 어린이집 버스에서 막 내린 소율이 가게 문을 벌컥 열고 뛰어들어와 화분을 발견하고는 눈을 반짝였다. 조그만 손이 토분을 향해 곧장 뻗어나가며 "이거 나 주는 거예요, 아저씨?" 하고 묻는 목소리에는 이미 확신이 가득했다. 상황은 순식간에 서아가 손 쓸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결국 화분은 소율의 두 손에 안착했다. 소율은 화분을 껴안듯 품에 안고는 연신 "예쁘다, 예쁘다" 중얼거렸는데, 그 모습을 보는 서아의 마음은 복잡하게 뒤엉켰다. 아이가 좋아하는 걸 보니 밀어내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순순히 받아들이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미경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는데, 입가에 걸린 미소가 무언가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서아는 그 웃음의 의미를 캐물을 새도 없이 도현이 다음 말을 꺼냈다. "그리고, 서아씨." 존대로 바뀐 호칭이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편하게 서아야, 부르던 어머니와는 대조적으로, 도현의 입에서 나온 그 존대는 마치 거리를 두려는 것 같기도, 무언가를 선언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내일부터 여기서 며칠 일 좀 도와드리기로 했어요. 어머니께서 손이 부족하시다고 해서." 서아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잘못 들은 건가, 다시 물어봐야 하나 싶은 생각이 스치는 사이에도 도현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도망칠 곳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그제야 명치를 꽉 조여왔다. 매일같이 마주쳐야 한다는 뜻이잖아, 애써 피해 다니던 길목이 결국 좁혀들어 이 작은 가게 안까지 들어와버렸다는 뜻이잖아. "엄마, 지금 뭐라고 하신 거예요?"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감추려 애썼지만 이미 새어 나온 뒤였다. 미경은 시선을 피하며 애매하게 웃을 뿐,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고, 서아는 그런 어머니의 얼굴에서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며,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불안이 발끝부터 스멀스멀 차오르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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