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고려연합 흑성단 소속으로 산 지 벌써 팔 년째다.
남들은 첩보요원이라고 하면 뭔가 근사한 걸 상상하는 모양인데, 실상은 팔 년 내내 서류 뒤지고 계좌 추적하고 뇌물 명세 엑셀 파일 붙잡고 밤새는 게 일이었다.
낭만이라곤 하나도 없는 직업.
가끔 신입 요원들이 나한테 와서 묻는다.
"선배님, 첩보 활동 하시면서 멋진 순간 없으셨어요?"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딱히 없다.
있다면 3년 전에 협회 지하 자료실에서 밤새 서류 뒤지다가 라면 국물을 노트북에 흘려서 반나절 날린 것 정도.
그게 내 인생 최고의 액션 신이었다.
그런 내가 오늘, 청람성 의원 선하란의 계좌 내역을 손에 넣었다.
과정은 하나도 안 멋있었다.
협력 관계에 있는 은행 전산실 직원한테 커피 세 번 사고, 담배 한 보루 찔러주고, 야근하다 몰래 백업 서버 열람 권한 빌려서 세 시간 동안 로그를 뒤졌다.
영화에서 보면 첩보요원들은 손가락 몇 번 두드리면 다 뚫리던데, 현실은 그냥 인맥과 뇌물의 콜라보였다.
[문서: 청람성 대박물관 학예사 채용 관련 자금 흐름 - 총 3건]
[음성 파일: 이사회 위원 접촉 녹취 - 2건]
오, 이거 물건이네.
화면에 뜬 파일 목록을 보고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팔 년 만에 처음으로 '이거 특종이다' 싶은 물건을 잡았다.
그것도 다른 종족도 아니고, 청람족.
청람족이라는 종족을 아는가.
장수종족이고, 평균 수명이 천 년 가까이 되는 데다, 외형은 인간 기준으로 봐도 지나치게 잘 뽑혀서 나온다.
'인간이 만든 미의 기준을 아득히 초월했다'고 하면 좀 오버 같지만, 실제로 보면 그 말이 딱 맞다.
피부는 옥처럼 은근한 광택이 돌고, 눈동자는 깊은 물속처럼 짙은 청록색.
체온이 인간보다 낮아서 살결이 서늘한데, 그게 또 묘하게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나는 청람족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이... 아니, 정정한다.
집착이 있다.
예전부터 그랬다.
학창시절부터 청람족 나오는 다큐멘터리는 다 찾아봤고, 성인이 된 뒤로는 청람성 관련 정보라면 뭐든 긁어모았다.
고등학교 때는 청람족 특집 다큐 재방송을 보겠다고 새벽 세 시에 알람까지 맞춰놨었다.
어머니가 방문 열고 "너 이 시간에 뭐하니" 물으셨을 때, 나는 진지하게 "인류학적 연구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그 뒤로 나를 좀 다르게 보셨다.
남들은 취미로 낚시나 게임을 한다는데 나는 이 짓을 했다.
'취향이 특이하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취향이 일과 딱 맞아떨어졌다.
선하란.
860세.
청람성 상원 의원, 고려연합-청람성 외교 채널 담당자.
딸 하나, 선하늬. 천경 상고문명 대박물관 학예사로 최근 채용됐다.
[대상 정보 - 선하란]
[종족: 청람족]
[직위: 청람성 상원 의원 / 외교 채널 담당]
[명예 등급: 상급 (청람성 내 상위 1% 가문)]
명예 등급 상급이라니.
이런 사람이 뇌물을 썼다는 게 참, 세상 일 알 수가 없다.
문제는 그 채용이 정상적인 절차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것.
이사회 위원 세 명에게 개인 자산을 흘려 자리를 만들어줬다.
액수 자체는 크지 않았다.
인간 기준으로는 그냥 웬만한 아파트 한 채 값 정도.
하지만 청람족 사회에서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청람족 사회에서 이런 부정이 밝혀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청람성 법률상 뇌물수수는 가문 전체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중죄다.
딸은 자격 박탈은 물론, 청람성 시민권까지 흔들릴 수 있다.
게다가 이 여자는 외교 채널 담당자다.
고려연합 쪽에서 이 사실 하나만 흘려도, 청람성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탄핵 절차가 들어갈 만한 사안이었다.
나는 이 자료를 손에 쥐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이걸 그냥 협회에 넘기면 특진 정도는 하겠지.'
특진.
승진.
월급 인상.
팔 년째 만년 대리로 썩고 있는 나한테는 나쁘지 않은 그림이다.
동료들이 "저 자식 드디어 뭐 하나 건졌네"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도 상상해봤다.
근데 그러기엔 아까웠다.
너무 아까웠다.
이건 승진 따위로 소진할 카드가 아니었다.
선하란의 프로필 사진을 다시 열었다.
860세라는데 외형은 인간 기준 삼십 대 초반쯤 보인다. 그것도 그냥 삼십 대가 아니라 '어떤 화보에서도 본 적 없는' 수준의.
짙은 남청색 머리칼, 서늘한 눈매, 그리고... 아무튼 그렇다.
화면을 확대해서 눈매 부분만 다시 봤다.
청록색 눈동자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있는데, 그 시선이 마치 화면 밖의 나를 뚫어보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860살 먹은 사람 얼굴이야.'
나는 진심으로 억울했다.
인간은 삼십 대만 넘어도 얼굴에 세월이 티가 나는데, 이쪽은 팔백 년 넘게 살고도 저 모양이라니.
종족 간 불평등 조약이라도 하나 만들어야 할 판이었다.
오랜 세월 수백 명의 인간 앞에서도 눈 한번 안 깜빡였을 위엄있는 얼굴.
공식 석상에서는 늘 저런 표정을 짓겠지.
외교 채널 담당자니까 협상 테이블에서도 저 얼굴 그대로 앉아 있었을 거고.
아마 상대국 요원들이 저 눈빛 한번에 말 더듬었을 게 뻔했다.
그 얼굴이 나 때문에 무너지는 걸 보면 어떤 기분일까.
'이거 완전 미친 생각이잖아.'
알고 있다.
협회 윤리 규정 제몇조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어딘가에 이런 짓 하면 안 된다고 적혀 있을 거다.
정보를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사용하지 말 것.
확보한 자료는 반드시 정식 경로로 보고할 것.
뭐 그런 조항들.
그런데 이미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개인 채널 접속 - 청람성 의원 선하란]
[메시지 발송 준비 완료]
시스템 창이 뜨는 순간에도 나는 마우스를 딱히 멈추지 않았다.
'경고. 이 채널은 공식 외교 통신망과 별도로 관리되는 개인 회선입니다. 무단 접속 시 협회 규정 위반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경고 문구까지 친절하게 떠줬는데, 나는 그걸 그냥 눌러서 닫아버렸다.
'그래, 근데 이미 늦었어.'
나는 문서 캡처 두 장과 음성 파일 일부를 첨부하고, 짧게 문장을 썼다.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
너무 위협적으로 보이면 안 되고, 너무 정중하면 또 이상하고.
결국 세 번째 초안에서 손을 멈췄다.
"의원님, 대단히 흥미로운 자료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딸 되시는 분 채용 건이더군요. 조용히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읽어보니 딱 협박범 대본 같았다.
'뭐, 실제로 협박범이니까.'
나는 스스로 납득하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찌잉-.
메시지가 청람성 네트워크를 타고 날아가는 소리가 실제로 들린 건 아니지만, 나는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전송 완료 표시가 뜨자마자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보낸 거지?'
'되돌릴 방법은 없는 거지?'
확인 메시지를 몇 번이나 다시 눌러봤다.
당연히 되돌릴 방법 같은 건 없었다.
당연하지, 협회 통신망이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다.
몇 분 뒤, 답신 대신 화면 하나가 떴다.
청람성 개인 통신망은 상대가 접속하면 자동으로 상태 표시가 뜨는데, 선하란의 상태는 '접속 중 - 응답 대기'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그 문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응답 대기라니, 뭘 그렇게 오래 고민하시나.'
분 단위로 초조해지는 스스로가 웃기기도 했다.
협박 메시지 보내놓고 답장 기다리는 꼴이라니, 짝사랑하는 애한테 카톡 보내고 안절부절못하는 학생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그 아래, 실시간으로 잡힌 그녀의 영상 통화 화면 미리보기.
860년을 살아온 청람족 의원의 얼굴이, 문장 몇 줄에 완전히 굳어 있었다.
입술은 반쯤 벌어졌고, 눈동자는 화면을 몇 번이고 다시 읽는 것처럼 흔들렸다.
평소라면 저 정도 위엄이면 상원 회의장에서도 눈 하나 깜빡 안 할 얼굴인데, 지금은 딱 시험 답안지 채점 결과 보고 얼어붙은 학생 표정이었다.
'860살 먹고도 이런 표정을 짓는구나.'
어쩐지 조금 감격스러웠다.
나는 그 표정을 캡처해서 저장했다.
'이거, 소장 가치 있는데.'
파일명을 뭐라고 지을까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날짜와 시간만 붙여서 저장했다.
나중에 이 순간을 다시 꺼내볼 날이 있을 것 같았다.
웃음이 나왔다.
나쁜 놈이라는 건 안다.
근데 어쩌겠나.
이미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지.
화면 하단에 응답 대기 표시가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그 깜빡임을 보고 있자니, 마치 상대가 지금 이 순간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고르고 있을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860년을 살아온 여자가 이런 문장 하나에 이렇게까지 흔들릴 줄은, 사실 나도 몰랐다.
그리고 몇 초 후, 화면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
[선하란 - 영상 통화 요청]
나는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벌써?'
생각보다 빨랐다.
너무 빨랐다.
수락 버튼과 거절 버튼이 나란히 떠 있었다.
나는 잠시, 정말 잠시, 숨을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