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숙소는 협회 소유의 안전가옥 중 하나였다.
외부 지도에도, 등기부에도 존재하지 않는 건물.
협회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유령 부동산'이라고 했다.
외부에는 절대 노출되지 않는 곳이고, 통신 감청도 완전히 차단된다.
벽 안에 전자기 차단재가 들어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이게 무슨 냉전 시대 벙커냐' 싶었는데, 막상 안에 들어와 보니 인테리어는 또 꽤 아늑했다.
소파는 푹신했고, 조명은 은은했고, 냉장고 안에는 협회가 미리 채워둔 음료수까지 있었다.
'복지 하난 진짜 신경 쓰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청람성 정보망이라도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절대 새어나갈 수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열 시가 되기 조금 전, 문이 열렸다.
선하란이 먼저 들어왔다.
그 뒤로 목라윤이 따라 들어왔다.
선하란은 평소의 그 단정한 정장 차림 그대로였다.
860년을 살아온 사람답게, 옷매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표정도 여전히 무표정에 가까웠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손가락 끝에 미세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목라윤의 눈빛은 살벌했다.
말은 없었지만 그 시선이 하는 말은 명확했다.
'네놈이 뭘 하려는지 다 지켜보겠다.'
솔직히 좀 무서웠다.
청람족 정예 경호 인력 출신이라고 했던가.
저 눈빛만으로도 사람 하나 정도는 그냥 태워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
'그래, 그렇게 지켜봐.'
나는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는 저 여자가 당장이라도 내 목을 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이런 데서 밀리면 안 된다는 걸, 나는 나름 잘 알고 있었다.
숙소 안쪽, 침실 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나는 선하란에게 손짓했다.
선하란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수백 년 동안 상원의원으로 살아온 사람의 관록이 문턱 앞에서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녀는 침실 안을 한 번 보고, 다시 나를 바라봤다.
"약속부터 확인하겠습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평소보다 낮았다.
"오늘 제가 여기에 들어가면, 하늬와 관련된 자료는 모두 폐기하는 겁니까?"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통신 단말을 들어 보였다.
화면에는 선하늬의 채용 경위와 관련된 자료 목록이 떠 있었다.
이사회에 전달될 경우 어떤 의혹이 제기될 수 있는지도 항목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조건을 지키시면요."
"사본도 남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의원님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죠."
선하란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나를 원해서가 아니었다.
자유롭게 선택한 만남은 더더욱 아니었다.
딸에게 향할 수 있는 위협을 막기 위해, 거절할 수 없는 조건 앞에 스스로를 밀어 넣었을 뿐이었다.
"목라윤 씨는 여기서 지켜보시면 됩니다."
나는 소파를 가리켰다.
"딱 이 자리에서만요."
목라윤의 턱이 굳었다.
청람족 특유의 서늘한 눈매가 나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졌다.
그 시선의 온도가 순간적으로 몇 도는 떨어진 느낌이었다.
"의원님께 손끝 하나라도 잘못 대면..."
목라윤이 낮게 경고했다.
말 끝을 흐렸지만, 그 뒤에 무슨 말이 붙을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죽인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정도의 기세였다.
"압니다."
나는 단말 화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남기지 않겠습니다. 그게 조건이었잖아요."
"그런 식으로 말을 비틀지 마십시오."
목라윤이 즉각 받아쳤다.
"의원님께는 언제든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권리를 행사하면 이 자료가 어디로 가는지도 알고 계시겠죠."
나는 화면에 표시된 전송 대상 목록을 보여줬다.
박물관 이사회, 감사부서, 청람성 내부 감찰기관.
선하란의 얼굴에서 마지막 남은 기색마저 사라졌다.
목라윤이 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이건 합의가 아닙니다."
"이름이 뭐든 결과는 같아요."
나는 침실 문을 잡은 채 대답했다.
"문이 열리거나 외부에서 강제로 통신 차단을 해제하면 자료가 자동으로 전송됩니다. 그러니 그 자리에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목라윤의 손이 떨렸다.
당장 나를 밀치고 선하란을 데리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하는 순간 선하늬가 표적이 될 수 있었다.
그 사실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선하란은 끝내 목라윤을 돌아보지 않았다.
"라윤."
짧은 한마디였다.
개입하지 말라는 명령이자, 자신이 감당하겠다는 통보였다.
목라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천천히 소파에 앉으며, 정확히 침실 문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위치를 골랐다.
두 손은 무릎 위에서 단단히 맞물려 있었다.
선하란은 결국 침실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문 하나 닫히는 소리가 이렇게 크게 울릴 일인가 싶었지만, 아마 숙소 전체의 정적이 그 소리를 유독 도드라지게 만든 모양이었다.
선하란은 침대에서 가장 먼 곳에 서 있었다.
등 뒤로 닫힌 문을 의식하면서도 손잡이를 잡지는 않았다.
문을 열면 딸과 관련된 자료가 전송된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앉으세요."
내 말에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선하란이 말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충분한지는 제가 판단합니다."
나는 단말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전송 대기 화면이 그녀에게도 보이도록 일부러 화면을 위로 향하게 했다.
선하란의 시선이 화면에 머물렀다.
선하늬의 이름 아래로 여러 개의 문서 제목이 줄지어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등은 꼿꼿했지만 두 손은 무릎 위에서 굳어 있었다.
"약속을 지키세요."
그녀가 다시 말했다.
"하늬는 이 일과 관계없습니다."
"그러니까 의원님이 여기 계신 거겠죠."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선하란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손을 뻗는 순간에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싫습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한 거부였다.
나는 탁자 위의 단말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도 곧바로 그쪽으로 끌려갔다.
"그럼 전송을 시작할까요?"
선하란은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은 동의가 아니었다.
거절했을 때 딸에게 돌아갈 대가를 계산한 끝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녀는 이후 거의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시선은 벽의 한 지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대답은 늦게 돌아왔고, 몇 번은 질문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몸은 그 방 안에 있었지만 정신만은 다른 곳으로 물러난 것처럼 보였다.
손끝은 차갑게 굳었고, 호흡은 얕아졌다.
나는 그 반응을 보면서도 단말을 치우지 않았다.
딸의 이름이 떠 있는 화면을 계속 그녀의 시야 안에 두었다.
문밖에서는 가죽이 눌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목라윤이 소파 팔걸이를 움켜쥐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 번은 의자가 밀리는 소리도 났다.
"의원님."
문 너머로 목라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선하란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괜찮다."
그녀는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괜찮다는 말과 달리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하지만 목라윤은 문을 열지 못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자료가 전송될 수 있다는 내 경고가 두 사람 모두를 묶어두고 있었다.
그날 그 방에서 벌어진 일은 연애도, 유혹도 아니었다.
선하란에게는 자유롭게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딸의 처지와 자료를 이용해 그녀의 선택권을 통제했고, 그녀는 자신이 아니라 선하늬를 지키기 위해 그 강압을 견뎠다.
얼마 뒤 침실 문이 열렸을 때, 선하란은 들어올 때와 같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도 없었다.
그러나 걸음은 평소보다 느렸고, 문턱을 넘는 순간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목라윤이 곧바로 일어나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선하란은 처음에는 그 손길에도 흠칫했다.
누가 자신을 만졌는지 확인한 뒤에야 굳었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의원님."
목라윤이 다시 불렀다.
선하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은 창백했고, 초점을 잃은 눈은 한동안 바닥만 향해 있었다.
입술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목라윤 역시 멀쩡하지 않았다.
소파 팔걸이에는 깊은 손톱 자국이 남아 있었고, 꽉 쥔 손바닥에도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개입할 힘이 있으면서도 개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선하란은 목라윤의 부축을 받으며 소파에 앉았다.
한 손으로 다른 쪽 손목을 감싼 채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자 손끝이 뒤늦게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탁자 위의 단말을 집어 들었다.
"약속한 자료는 처리하겠습니다."
선하란은 내 말을 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목라윤만이 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봤다.
그 눈빛에는 분노와 혐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자책이 뒤섞여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숙소 밖 상황도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청람성 내부 네트워크에서 이상 신호가 하나 잡혔다는 보고가 늦게서야 내게 들어왔다.
[정보 유입: 청람성 사교계 채널 - 익명 게시글 1건 발견]
내용은 짧았다.
"선 의원, 최근 행적이 이상하다. 개인 통신 회선이 외부 접속 흔적으로 가득하다는데."
작성자 아이디는 익명 처리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 게시글이 어디서 나왔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청람성 상류 사교계도 결국 소문에는 약한 모양이었다.
어느 세계든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은 건가.
학교 다닐 때 급식실에서 돌던 연애 소문이나, 고위 의원의 통신 흔적에 관한 이야기나, 본질적으로는 심심한 사람들의 취미생활 아닌가 싶었다.
'이거, 슬슬 새어나가는 건가.'
나는 게시글 캡처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외부 접속 흔적"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 선하란의 통신 회선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건 곧 이 관계가 언제까지고 밀실 안에만 갇혀 있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없을 수도 있겠는데.'
(선하늬 시점)
한편, 천경 상고문명 대박물관.
같은 시각, 나는 야근 중이었다.
유물 정리 업무는 원래 야근이 잦은 부서였지만, 오늘은 특히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걸어둔 정기 안부 통신이 사흘째 연결되지 않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하루 이틀 안에 답이 오던 게, 이번에는 완전히 침묵이었다.
나는 통신 단말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수신 대기 중' 표시만 계속 떠 있을 뿐, 응답 신호는 전혀 잡히지 않았다.
나는 유물을 정리하다 말고 잠시 손을 멈췄다.
들고 있던 고대 유물 파편이 손끝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집중해야 하는데.'
스스로 다잡았지만, 머릿속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오랜 세월 동안 한 번 정한 원칙을 좀처럼 어기지 않는 사람이 사흘씩 연락을 끊는 건 보통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늘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형식으로 안부를 확인했다.
짧게라도 답을 남겼고, 답이 늦어질 때는 미리 이유를 알려줬다.
그 규칙성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이상 신호였다.
최근 부서 안에서도 이상한 이야기가 돌았다.
내 채용 경위에 관해 누군가 캐묻는 문의가 이사회 쪽으로 들어왔다는 소문이었다.
동료 연구원 하나가 지나가듯 흘린 말이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흘려들었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마음에 걸렸다.
'왜 지금 와서 내 채용 경위를 캐묻는 거지.'
내가 이 박물관에 들어온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 시점에, 왜 갑자기.
소문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누가 내 채용 과정에 관심을 보이는지도, 그 사람이 무엇을 확인하려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만은 확실히 들고 있었다.
어머니의 침묵과 나를 향한 알 수 없는 관심.
두 가지가 서로 무관하다고 생각하기에는 타이밍이 지나치게 절묘했다.
나는 다시 어머니에게 통신을 걸었다.
연결음은 울리지 않았다.
화면에는 여전히 같은 문구만 떠 있었다.
'수신 대기 중.'
나는 단말을 내려놓지 못한 채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한도현 시점)
선하란은 한동안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목라윤은 그녀의 옆에 앉아 있었지만 함부로 손을 대지도 못했다.
조금 전 선하란이 자신의 손길에도 놀랐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물을 가져다 놓았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방 안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가 가라앉아 있었다.
선하란은 고개를 숙인 채 호흡을 고르려 했고, 목라윤은 분노를 억누르느라 턱에 힘을 주고 있었다.
이 밤의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선하란과 목라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청람성 사교계에 올라온 게시글과 선하란의 굳은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소문은 이미 안전가옥 바깥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딘가에서는 선하란의 통신 흔적을 추적하고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선하늬의 채용 경위를 캐고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또 다른 문제들이 줄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청람성 사교계의 소문, 목라윤의 적의, 그리고 어딘가에서 서서히 조여오고 있을 정체 모를 시선까지.
목라윤은 선하란이 겨우 몸을 일으키자 조심스럽게 곁을 지켰다.
선하란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숙소를 나선 뒤에도 소파 팔걸이에 남은 손톱 자국과 손대지 않은 물컵 두 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숙소 바깥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통신 단말이 짧게 진동했다.
그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발신자는 표시되지 않았다.
내용은 단 한 줄이었다.
[표적 확인 완료.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나는 아직 그 메시지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