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48시간이라는 시한은 사람을 참 초조하게 만든다.
협박당하는 쪽 얘기다.
협박하는 쪽인 나는 오히려 여유가 넘쳤다.
남은 시간에 뭘 할까 고민하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라면을 먹을까, 아니면 좀 더 우아하게 커피나 마셔볼까.'
세기말 대협상을 준비하는 놈의 고민이 이 수준이라니.
나도 참 대단한 놈이다.
선하란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생각해봤다.
860년을 살면서 이런 종류의 위협을 처음 받는 건 아닐 거다.
외교관 자리에 있으면 이권 다툼, 정보전 같은 건 늘 겪는다.
근데 이번엔 딸이 걸려 있다는 게 다르다.
자식 문제 앞에서는 800년이든 8년이든 다를 게 없다.
그게 사람이든, 청람족이든.
그녀가 제일 먼저 움직인 건 경호팀장이었다.
[정보 유입: 선하란 개인 채널 - 경호팀장 목라윤과의 통신 감청 성공]
청람성 개인 통신망은 뚫기가 어렵기로 유명한데, 이번 일을 위해 흑성단 쪽 기술팀에 이미 손을 좀 써놨다.
감청까지 가능해질 줄은 나도 몰랐다.
'준비를 참 잘했군, 나.'
역시 사람은 준비성이 반이다.
학창시절엔 시험 전날 벼락치기만 하던 놈이, 이런 데서는 참 철저해진다.
아이러니한 일이지.
목라윤. 청람족 보안 요원. 선하란의 개인 경호팀장.
청람족 여성 특유의 그 서늘한 미모에 더해서, 몸매가 딱 봐도 실전형이다.
체술 기반 근접전이 주특기라는 정보를 이미 파악해뒀다.
딱 봐도 저 여자한테 잡히면 뼈 몇 개는 그냥 나가겠구나 싶은 인상.
'괜히 자극하지 말자.'
통신 내용을 훑었다.
"의원님, 이 협박자 신원을 아직 못 찾았습니다." 목라윤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고려연합 정부 시스템에 접속 흔적이 있는데, 그 이상은 완전히 차단돼 있어요."
"흑성단인가." 선하란이 낮게 물었다.
"확실치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흑성단이면 문제가 커진다." 선하란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저들 요원 신상은 우리 쪽 정보력으로도 뚫을 수 없어."
맞다.
못 뚫는다.
860년 산 외교관도 못 뚫는 걸 나는 그냥 흑성단 이름 하나 팔아서 방어막을 쳐놓은 셈이니, 이거 참 사기 치는 재미가 있다.
'이래서 사람들이 명품 브랜드에 돈을 쓰는구나.'
이름값이라는 게 원래 이런 거다.
실체가 없어도 이름만으로 상대를 벌벌 떨게 만드는 거.
목라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남에 응하실 겁니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정적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다음 대사를 기다렸다.
드라마 클라이맥스 보는 기분이었다.
"...하늬한테는 알리지 마." 선하란이 겨우 뱉은 대답이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좀 웃겼다.
딸 이름 나오니까 결정이 바로 나오네.
860년 살아온 위엄이라는 것도 결국 이런 데서 무너지는구나.
'그러니까 자식 앞에서는 다들 똑같다는 거지.'
청람족 최고 외교관이든, 옆집 아저씨든.
자식 얘기 나오면 목소리 한 톤 낮아지고, 판단력이 순간적으로 감정에 잡아먹힌다.
이게 종족을 초월한 공통 유전자인가 싶었다.
목라윤이 뭔가 더 말하려는 듯했지만, 선하란이 먼저 통신을 끊었다.
딱, 하는 소리가 감청 채널 너머로 들려왔다.
'단호하네.'
선하란이 다음으로 한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혼자 개인 회선으로 내게 메시지를 보낸 것.
"경호팀은 배제합니다. 저 혼자 나가겠습니다."
이건 좀 뜻밖이었다.
대비책으로 목라윤을 붙일 거라 생각했는데.
'보통은 백업을 붙이지 않나?'
협상 자리에 혼자 나온다는 건, 상대를 얕보는 거거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거거나 둘 중 하나다.
860년 살아온 여자한테 저 둘 다 해당된다고 봐야겠지.
그런데 이유는 곧 짐작이 갔다.
860년 살아온 자존심.
그녀는 이 굴욕적인 협상 자리에 자기 부하가 서 있는 걸 견딜 수 없었던 거다.
'아, 이거 흥미로운데.'
생각해보면 이해가 간다.
평생을 위엄 있는 외교관으로 살아온 사람이, 협박범 앞에서 굽히는 장면을 부하한테 보여주고 싶을 리 없다.
그 자존심이라는 게 어찌 보면 무기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발목을 잡는 족쇄이기도 하다.
나로서는 후자 쪽이 훨씬 이득이지만.
다시 답신이 왔다.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세요."
나는 미소가 나왔다.
'좋아, 이제 진짜 시작이다.'
장소를 어디로 잡을지 사실 며칠 전부터 고민했다.
너무 화려한 곳이면 그녀가 편하게 느낄 테고, 너무 위험한 곳이면 경계심만 키울 테니까.
적당히 격에 안 맞으면서, 동시에 안전하다는 착각을 심어줄 곳.
그런 곳이 딱 하나 떠올랐다.
"청암동 골목 안, '별빛찻집'. 내일 저녁 8시."
허름한 뒷골목 찻집. 청람성 외교관에게는 격에 안 맞는 장소일 거다.
그것도 계산에 포함된 선택이었다.
높은 사람일수록 낮은 곳에 오면 심리적으로 흔들린다.
평소 다니던 고급 회의장, 대사관 응접실 같은 곳이 아니라 시장 뒷골목 낡은 찻집이라면, 그 낙차 자체가 그녀를 위축시킨다.
'익숙한 무기를 빼앗는 거지.'
협상이든 전투든, 상대를 자기 홈그라운드에서 끄집어내는 게 절반은 이긴 거다.
답신은 짧았다.
"알겠습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나는 잠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날 밤을 상상했다.
860년을 살아온 여자가 나를 마주보고 앉아 있을 모습.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떤 말로 협상을 시도할까.
그리고 그 협상이 어떻게 무너질까.
'벌써 기대되네.'
한편으로는 좀 걱정도 됐다.
아무리 계산을 잘 짜놨어도, 860년 산 여자가 어떤 수를 들고 나올지는 알 수 없으니까.
체술 기반 경호팀장 없이 혼자 온다는 게, 정말로 무방비 상태라는 뜻인지, 아니면 다른 방식의 대비책이 있다는 뜻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마 본인이 직접 싸울 생각인가?'
외교관이라고 해도 860년을 산 존재라면, 전투력이 전혀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 생각이 들자 살짝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그날 낮에는 별빛찻집 주변을 한 바퀴 둘러봤다.
좁은 골목, 낡은 간판, 삐걱거리는 나무문.
누가 봐도 시대에 뒤떨어진 가게였지만, 나는 이 가게 사장님한테 미리 이야기를 좀 해뒀다.
"저녁 8시쯤 손님 한 분이랑 조용히 얘기할 일이 있어서요."
"그래! 그래! 알겠네, 자리 비워둘게!"
사장님은 사람 좋게 웃으며 흔쾌히 승낙해줬다.
이 아저씨는 내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꿈에도 모를 거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그냥 좀 이용할게요.'
찻집 안쪽 구석 자리에 미리 앉아서, 창밖으로 골목 입구를 계속 살폈다.
시간이 갈수록 손바닥에 땀이 좀 배기 시작했다.
'나도 은근히 떨리는구나.'
860년 산 상대와 단독 담판이라니, 이거 원 무슨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 아닌가.
그날 저녁, 나는 별빛찻집에 미리 도착해서 자리를 잡았다.
8시 정각.
찻집 문이 조용히 열렸다.
청록색 눈동자, 짙은 남청색 머리칼.
인간이라면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위엄과 우아함을 걸치고, 선하란이 걸어들어왔다.
그 얼굴엔 두려움과 경멸이 반씩 섞여 있었다.
찻집 안 손님 몇몇이 그녀를 힐끔거렸다.
당연하다.
이런 허름한 골목에 저런 존재감이 걸어들어오는데 안 쳐다볼 사람이 어디 있겠나.
선하란은 그 시선들을 아예 무시하듯 곧장 내 자리로 걸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슨 사형장으로 걸어가는 사람처럼 무겁고 단호했다.
'저 정도 각오로 오는 건가.'
그녀가 내 앞에 앉기 직전, 잠깐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있었다.
경멸과 분노, 그리고 그 아래 숨긴 두려움까지.
860년 산 여자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좋아,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