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칼을 쥔 첫사랑

1화

3월의 교실은 아직 겨울의 냄새를 다 지우지 못한 채 서늘했는데, 나는 창가에서 세 번째 줄 두 번째 자리에 앉은 한지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끝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그가 필기를 하려고 손을 움직일 때마다 셔츠 소매 사이로 드러나는 손목의 힘줄,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그의 옆얼굴에 얕게 부서지는 모양, 그리고 가끔 턱을 괴며 지루한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버릇까지, 나는 이미 그의 모든 것을 외우고 있었다. 처음 그를 본 건 작년 가을 축제 준비 위원회에서였는데, 그날 그가 무거운 책상을 대신 옮겨주며 웃었던 그 순간부터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 서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의 시간표를 외웠고, 그가 하교 후 어느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 먹는지, 어떤 요일에 축구부 훈련이 늦게 끝나는지, 심지어 그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맛이 딸기라는 것까지도 알아냈다. 그를 지켜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고, 사랑이라면 이 정도의 관심은 당연한 거라고, 오히려 이만큼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상한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럴리가. 이게 이상한 걸까. 그런 물음이 문득 스칠 때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그의 뒤통수로 시선을 옮겼다. 수업 시간이 절반쯤 지났을 때, 선생님이 칠판에 무언가를 적으려 몸을 돌리는 사이 지호가 옆자리 친구에게 무어라 속삭이며 웃었는데, 그 웃음소리가 교실 소음 속에 섞여 들려오는 순간에도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귀에 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나는 그 웃음의 이유를 알고 싶어서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가, 옆자리 친구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서야 황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노트에 눈을 내리깔았지만 펜 끝은 이미 아무 의미 없는 선만 반복해서 긋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들과 웃으며 복도로 나갔고, 나는 가방 속에 넣어둔 편지를 다시 한번 만지며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느꼈다. 몇 주 전부터 써온 편지였는데, 몇 번을 다시 쓰고 다시 지웠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처음엔 그저 좋아한다는 한 문장으로 시작했다가, 그 한 문장이 너무 가벼워 보여서 지웠고, 그다음엔 그를 지켜봐온 시간을 하나하나 나열하다가 이번엔 너무 무거워 보여서 다시 지웠다.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시간이, 그의 걸음걸이 하나하나까지 관찰해온 그 집요한 애정이, 겨우 몇 줄의 문장으로 다 담길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써야 했다. 결국 완성한 편지는 몇 번이나 접었다 펴서 귀퉁이가 조금 해진 상태였는데, 그 해진 자국마저도 나는 이상하게 소중하게 느껴졌다. 점심시간, 나는 급식을 먹는 대신 도서관 구석에 앉아 편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었다. 이 정도면 충분할까. 너무 과한 건 아닐까. 혹시 이걸 읽고 그가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엉키는 동안에도 나는 편지를 고쳐 쓰지는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다시 쓴 끝에 나온 결과물이었으므로, 더 손을 대면 오히려 진심이 흐려질 것 같았다. 방과 후, 나는 그의 반 앞 복도에서 그가 나오길 기다리며 편지를 가슴에 품은 채 서 있었는데, 손바닥에 땀이 배어 편지지가 눅눅해지는 것 같아 몇 번이나 옷에 문질러 닦아야 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몇 주간 그를 지켜보며 이미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정작 마주할 순간이 다가오자 나는 다리가 후들거려 벽에 등을 기대야 했다. 복도를 지나가는 다른 학생들의 발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청소 도구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어디선가 울리는 종소리까지도 그 순간엔 유독 크게 느껴졌다. 몇 분이 지났을까, 교실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몇몇 아이들이 먼저 가방을 메고 나오는 게 보였다. 나는 그 틈에서 지호를 놓치지 않으려 시선을 고정한 채, 편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마침내 교실 문이 열리고 지호가 가방을 메며 나왔고,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가 나를 발견하고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걸음을 멈췄는데, 그 짧은 순간 내 안에서 온갖 계산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말을 걸어야 하나, 아니면 그냥 편지를 건네고 도망쳐야 하나. 그의 눈이 나를 향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목이 타는 것 같았고, 준비했던 말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흩어져버렸다. 결국 나는 편지를 그의 손에 밀어 넣듯 쥐어주며 짧게 말했다. "이거… 읽어봐 줘." 지호는 얼떨결에 편지를 받아 들고는 나를 빤히 쳐다봤는데, 그 눈빛에 담긴 게 호기심인지 경계인지 알 수 없어 나는 그대로 뒤돌아 뛰듯 걸어갔다. 등 뒤로 그의 시선이 계속 따라오는 것 같아 목덜미가 뜨거워졌고, 나는 그 열기를 느끼며 처음으로 이 감정이 얼마나 커져버렸는지를 새삼 실감했다. 복도를 다 벗어날 때까지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발걸음은 점점 빨라져 거의 뛰는 속도가 되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가방 속에 넣어둔 다른 종이 한 장을 만지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지호의 집 주소가 적힌 메모였다. 몇 주 전, 그가 친구와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엿듣다가 알아낸 아파트 이름과 동, 호수까지도 나는 이미 외우고 있었다. 이런 걸 안다고 해서 나쁜 건 아니야. 그저 그를 더 잘 알고 싶었을 뿐이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면서도, 어째서인지 심장 한구석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걸 느끼며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면서도, 편의점 앞을 지나면서도, 나는 오직 그 메모의 존재감만을 손끝으로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집에 도착해 방문을 닫고 나서야 나는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하늘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며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 어스름한 빛 속에서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몇 번이나 되짚었다. 그가 편지를 받아 들던 손의 움직임, 그 눈빛의 온도, 내가 뒤돌아설 때 등 뒤로 느껴졌던 시선의 무게까지. 그날 밤, 나는 방 안 불을 끈 채 창밖을 바라보며 지호가 지금쯤 내 편지를 읽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가 편지를 읽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놀랄지, 웃을지, 아니면 아예 찢어버릴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시계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고, 나는 그 소리를 세듯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기를 반복했다. 만약 그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 순간 나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가운 생각이 스치는 걸 느꼈고, 서둘러 그 생각을 지워버리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지워지지 않았다. 그가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물음은 밤새 내 머릿속을 맴돌았고,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나는 몇 번이나 그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지만, 오히려 생각은 점점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결국 나는 서랍 깊숙이 넣어둔 작은 커터칼을 꺼내 손끝으로 그 차가운 감촉을 매만지며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이건 그냥… 만약을 위한 거야. 정말 만약을 위한 거야. 창밖으로 지나가는 차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나는 그 칼날의 차가움을 손끝에서 놓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내일이 되면 그는 뭐라고 말할까. 그 대답을 알기 전까지는, 나는 아마 오늘 밤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할 것 같았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