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칼을 쥔 첫사랑

4화

엄마의 손에 들린 커터칼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손끝은 이미 얼음처럼 차가워졌으며, 목이 타는 느낌에 침을 삼키려 해도 삼켜지지 않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이 상황을 넘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정신없이 헤집었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형편없이 궁했다. 엄마는 그 칼을 손끝으로 뒤집으며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는데, 그 손길이 마치 증거물을 감식하는 형사의 그것처럼 느껴져 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배어나는 걸 느꼈다. 책상 위 서랍이 반쯤 열려 있는 걸 보니, 청소를 한다는 명목으로 방에 들어와 뒤진 게 분명했다. 도대체 왜 하필 오늘, 왜 하필 지금. "그건… 미술 준비물이야. 커터가 필요해서."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감추려 애썼지만, 엄마의 눈빛은 이미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미술 시간에… 이렇게 큰 칼이 필요해?" 엄마가 되물으며 칼을 이리저리 살펴보자, 나는 손을 뻗어 그것을 낚아채듯 가져왔다. 손바닥에 닿는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오히려 안도감을 주는 게 이상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이제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마." 날카롭게 쏘아붙인 말에 엄마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나는 그 순간 오직 커터칼을 되찾았다는 사실에만 안도했다. 그럴리가, 이 정도로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엄마는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방문을 닫고 나갔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서 나는 잠깐 어깨를 움츠렸다. 홀로 남은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한참을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진정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커터칼을 서랍 깊숙이, 옷가지 아래에 숨겨 넣으면서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다음부터는 더 조심해야 해.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돼. 다음날 학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여느 때처럼 창가 세 번째 줄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지호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넓은 어깨선과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옅게 비치는 머리카락 색까지도, 나는 이미 셀 수 없이 눈에 담아둔 터였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다른 게 있었다. 지호의 책상 옆에 낯선 여학생이 서서 웃고 있었던 것이다. "지호야, 이거 어제 말한 노트 필기." 그 여학생, 같은 반의 김수아였다. 밝은 목소리에 자연스러운 웨이브 머리, 누가 봐도 사교성이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지호가 그녀를 향해 웃으며 노트를 받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뒤틀리는 걸 느꼈다. 그 웃음이 마치 나에게만 향해야 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에게 새어나간 것처럼 아깝고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고마워, 수아야." 지호의 목소리에 담긴 자연스러운 친근함이 귀에 박히듯 들렸다. 저 웃음, 저 다정한 눈빛이 원래 나만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말아쥐며 나는 그 장면을 지켜봤다. 볼펜을 쥔 손끝이 저절로 떨려서, 노트 위에 의미 없는 선을 몇 번이고 그어댔다. 수업이 시작되고 선생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동안에도 나는 칠판 대신 지호의 뒷모습만 눈에 담았다. 지호가 문제를 풀다가 잠깐 뒤를 돌아볼 때, 그 시선이 수아 쪽을 향했는지 나를 향했는지 확인하려 애썼지만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속이 타들어갔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정상인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쉬는 시간이 끝나갈 무렵,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수아에게 다가갔다. 다리가 조금 뻣뻣하게 움직이는 게 느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저기, 김수아 맞지?" 웃으며 물었지만 내 목소리에 담긴 냉기를 그녀도 느꼈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 맞는데… 무슨 일이야?" "지호랑 친해?" 직접적인 질문에 그녀가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그냥… 같은 조여서 노트 좀 빌려주고 그런 거야. 왜?" 왜냐고? 그 질문이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왜 남의 연인 옆에서 그렇게 웃고 있는 건지, 왜 그렇게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저렇게 태연하게 웃을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걸까. "앞으로는 지호한테 너무 가까이 가지 말아줘."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었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수아의 얼굴에 놀람과 불편함이 동시에 스쳤다. "뭐? 나 그냥 같은 반 친구인데, 그게 무슨…" 그녀의 눈빛에는 억울함과 어이없음이 뒤섞여 있었지만, 나는 그런 반응조차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부탁이야." 나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자리로 돌아왔지만, 등 뒤로 느껴지는 수아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자리에 앉아서도 나는 한동안 책상 아래로 손을 떨고 있었다. 잘한 걸까, 아니면 이상하게 보였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지호는 내 것이니까. 누구도 그 자리를 넘봐서는 안 되니까.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옛 기억을 떠올렸다. 중학교 시절, 좋아했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도 지금의 지호처럼 다정했고,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했지만, 결국 다른 여자애와 사귀게 되면서 나를 철저히 무시했다. 그날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그 애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지나갔었다. '넌 좀… 부담스러워.' 그 아이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뒤부터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확신이 없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어졌다. 누군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다정하게 대하면, 그것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 늘 손끝을 조이며 확인하려 들었다. 지호를 향한 이 감정도 어쩌면 그때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나는 이내 그 생각을 밀어냈다. 아니야, 이건 사랑이야. 그저 그를 지키고 싶은 마음일 뿐이야.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낮에 있었던 일을 몇 번이고 되짚었다. 수아의 표정, 지호의 웃음, 그리고 내가 내뱉었던 말들. 혹시 지호가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까. 화를 낼까, 아니면 오히려 나를 더 이해해 줄까. 온갖 가능성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다가, 결국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신발장에 쪽지가 하나 더 꽂혀 있었다. 지호의 필체였다. 익숙한 필기체로 적힌 그 몇 글자를 보는 순간, 어제의 일이 벌써 지호의 귀에 들어간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스쳤다. '오늘 얘기 좀 하자.'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단호함이 느껴져 나는 손끝이 저릿해지는 걸 느끼며 쪽지를 꾹 움켜쥐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마저 크게 들려, 나는 신발장 문을 닫으며 조용히 숨을 삼켰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