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칼을 쥔 첫사랑

5화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내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한 칸, 한 칸 계단을 밟을 때마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진동이 그대로 가슴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고, 지호가 나를 왜 부른 건지, 어제 수아에게 했던 말이 그의 귀에 들어간 건지, 아니면 그저 아무 일도 아니어서 그냥 얼굴이나 보자고 부른 건지,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집고 다녔다. 계단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져 내렸지만 그 빛조차 나에게는 서늘하게만 느껴졌는데, 정작 문을 열고 옥상에 들어섰을 때 그의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바람이 옥상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지호의 셔츠 자락이 흩날리고 있었지만 그는 미동도 없이,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나는 문을 닫는 순간부터 느낄 수 있었다. "수아한테 무슨 말 했어?" 지호가 물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냉기가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웃으며 나를 먼저 안았을 그가, 팔짱을 낀 채 거리를 두고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미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냥… 좀 조심해달라고 했을 뿐이야." 나는 최대한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지만, 지호의 미간이 더 깊게 찌푸려지는 걸 보며 그게 통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손끝이 저절로 옷깃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수아는 그냥 같은 조 친구야. 네가 그렇게 다가가서 경고하듯 말할 이유가 없었잖아." 그의 말투가 점점 단호해졌다. 방어적이던 태도가 사라지고, 처음으로 그가 나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화를 내는 걸 보는 순간 나는 목이 타는 느낌에 침을 삼켰다. 늘 나를 다독이던 그 다정한 목소리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이 정말 내가 알던 지호인지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그냥… 걔가 너한테 너무 가깝게 다가가는 게 신경 쓰여서." 내 목소리가 흐려졌다. 사실을 말하자면 신경 쓰인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참을 수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뱉을 수는 없었다. 뱉는 순간 내가 얼마나 우스운 사람이 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윤아." 지호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불렀다. 그 짧은 한숨이 마치 무거운 돌덩이처럼 내 가슴 위로 내려앉았다. "어제 우리 집에도 갑자기 왔었잖아. 나는 그게… 좀 무서웠어." 무섭다는 그 한마디가 귓속을 파고드는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무섭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눈앞이 뿌옇게 흔들렸다. 옥상의 바람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고, 발밑이 흔들리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나는 두 손을 말아쥐며 겨우 서 있을 수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겨우 짜낸 목소리가 갈라졌다. 지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시선을 피하며 옷깃을 매만졌다. 그 사소한 손짓 하나가 그가 지금 얼마나 이 대화를 불편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아서, 나는 그 손이 멈추기를, 그 시선이 다시 나에게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냥, 조금만… 천천히 가면 안 될까. 너무 급하게 느껴져서." 천천히?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에 어떻게 속도가 있을 수 있는지, 좋아하는 마음을 어떻게 늦출 수 있는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 손을 잡았던 그 밤, 내가 먼저 그의 손가락 사이로 손을 밀어 넣으며 잡았을 때, 이제 우리 진짜 사귀는 거지, 하고 웃던 지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는 급한 게 없었으면서, 지금은 왜 급하다는 말을 하는 걸까.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애써 표정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조심할게." 대답은 그렇게 나갔지만, 마음속에서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왜 저 애를 저렇게 감싸는 걸까, 정말 그냥 친구일 뿐인 걸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걸까. 의심이 걷힐 줄 몰랐다. 지호가 먼저 계단 쪽으로 몸을 돌리며 내려갔고, 나는 그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겨우 발걸음을 뗐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아까와는 반대로,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고 그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날 오후, 체육 시간이 끝나고 축구부 훈련이 시작될 무렵, 나는 운동장 옆 벤치에 앉아 지호를 지켜보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의 물이 다 식어 미지근해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함성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운동장에서 그는 유난히 밝게 웃고 있었는데, 옥상에서의 그 냉랭한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웃음 속에 언뜻 수아의 모습이 스치는 걸 발견했다. 그녀가 운동장 반대편에서 친구들과 함께 지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고, 지호도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주고 있었다. 그저 그것뿐이었는데도, 나는 그 짧은 순간의 손짓 하나에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저렇게 쉽게 웃어줄 거면서, 나한테는 왜 그런 얼굴을 보였던 거야. 그 순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걸어갔다. 정확히 무엇을 하려는 건지도 모른 채, 그냥 그 장면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가방끈을 움켜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운동장의 흙먼지가 발밑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하지만 몇 걸음 걷다가 나는 걸음을 멈췄다. 지호와 함께 있던 축구부 친구, 담임 선생님이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나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기 때문이었다. "서하윤? 여기서 뭐 해?" 담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수업 시간 아닌데 여기 왜 있어?" 나는 순간 말을 더듬으며 핑계를 찾았다. "그, 그냥… 볼일이 있어서요." 목소리가 어색하게 갈라져 나왔다. 그 짧은 순간 담임의 시선이 내 손에 닿아 있었다. 가방 지퍼 사이로 삐죽 나온 커터칼의 손잡이가, 형광등도 없는 야외인데도 이상하게 눈에 띄었다. 오후의 햇살을 받아 그 은색 손잡이가 반짝, 하고 빛을 튕겨내는 것 같았다. "그건 뭐지?" 담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고, 나는 심장이 바닥까지 내려앉는 걸 느꼈다. 손이 저절로 가방 지퍼 쪽으로 움직이려다가 멈췄다. 지금 그걸 가리려는 행동조차 의심을 부풀릴 것 같아서, 나는 그저 그 자리에 굳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하필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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