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칼을 쥔 첫사랑

3화

지호의 아파트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을 인지했을 땐 이미 초인종에 손가락이 닿아 있었다. 3월의 밤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며 손끝을 얼려왔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발걸음을 돌릴까 고민했었는지,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골목을 두 번이나 빙빙 돌았는지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 그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고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까. 초인종 위에 얹은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누를까, 말까. 그 짧은 갈등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질 만큼, 이미 발은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띵—. 벨소리가 복도에 울리고,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오기까지의 그 몇 초가 마치 몇 분처럼 늘어지는 것 같았다. 도어락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는 순간, 지호의 얼굴에 스친 표정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반가움보다 먼저 떠오른 건 놀람이었고, 그 놀람 뒤에는 옅은 경계심이 따라붙었다. 그 짧은 순간의 표정 변화를 나는 몇 번이나 되짚어 볼 만큼 선명하게 눈에 담았다. "하윤아…? 여긴 어떻게…" 그가 말끝을 흐리며 나를 바라봤다. 현관문 사이로 반쯤 드러난 그의 몸, 편한 실내복 차림에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 씻고 나온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물방울 하나가 눈에 들어왔고, 나는 그것마저 다른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던 흔적은 아닐까 하는 어이없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 "그냥, 보고 싶어서." 나는 대답하며 웃어 보였는데, 그 웃음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웠는지는 지호의 눈빛이 다시 흔들리는 걸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가 내 주소를 물은 적도 없었고, 아파트 이름이나 동·호수를 알려준 적도 없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머리를 스쳤다. 아, 실수했나.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이 돌아갔다. 언제 흘렸더라, 어디서 봤더라, 그런 것들을 지호가 눈치채기 전에 그럴듯한 말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스러운 변명은 떠오르지 않았고, 그 사실이 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내가… 여기 산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소리에서 의심의 기미가 묻어났고, 나는 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걸 느꼈다. 어째서 이런 걸 물어보는 걸까. 사랑하는 사람의 집 정도는 당연히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입 밖으로는 다른 말이 나갔다. "저번에… 네가 지나가면서 말한 것 같아서." 거짓말이었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걸 그도 나도 알고 있었지만, 지호는 더 캐묻지 않고 그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침묵이 얼마나 무겁게 느껴졌는지, 나는 손끝이 떨리는 걸 감추려 주먹을 말아쥐었다. 복도의 센서등이 깜빡, 하고 한 번 꺼졌다가 다시 켜지는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지호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시선을 슬쩍 돌렸다. 뭔가를 더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결국 삼키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 표정 속에서 나는 그가 나를 완전히 믿지 않는다는 걸 읽어낼 수 있었고, 그 사실이 가슴 어딘가를 날카롭게 긁고 지나갔다. "들어올래?" 그가 결국 물었지만 목소리에는 예의상의 친절함만 남아 있을 뿐, 진짜 반가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섰는데, 좁은 현관에서 그와 어깨가 스치는 순간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이 냄새, 이 온도, 이 공간 전부가 그의 것이라는 사실이 나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신발을 벗으며 시선을 내리자 그의 운동화 옆에 낯선 슬리퍼 한 짝이 놓여 있는 게 보였는데, 그것이 손님용인지 누군가의 물건인지 알 수 없어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거실에 앉아 별다른 대화 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그의 방문 너머로 눈길을 자꾸 던졌다. 저 안에 뭐가 있을까, 누구의 사진이 붙어 있을까, 누구와 문자를 주고받는 걸까. 그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나를 갉아먹었다. 지호가 물 한 잔을 가지러 부엌으로 간 그 잠깐의 틈에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을 뻔했다. 겨우 참아냈지만, 그 짧은 충동이 스스로도 무서웠다. "물 마실래?" 지호가 컵을 건네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들었지만, 손이 스치는 순간에도 그의 표정에서 어떤 온기를 찾으려 애썼다. 그는 그저 무심하게 맞은편 소파에 앉을 뿐이었다. "하윤아." 지호가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요즘… 좀 힘들어. 매일 쉬는 시간마다 옆에 있는 거, 그리고 오늘처럼 갑자기 오는 거…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냥… 좀 갑작스러워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힘들다고? 내가? 사랑하는 게 힘든 일이라는 건가. 억울함과 불안함이 동시에 차올랐지만, 나는 애써 침착한 얼굴을 유지하며 고개를 숙였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것도 모른 채, 나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해하지는 마. 그냥… 나도 숨 좀 돌리고 싶어서 그래." 지호가 덧붙였지만, 그 말이 위로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불안을 심어주었다. 숨을 돌리고 싶다는 건, 결국 내가 없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닐까. 그 시간에 그는 누구를 만나려는 걸까. "미안해. 그냥… 네가 걱정돼서." 대답은 나왔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걱정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그가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있지 않은지, 다른 여자애랑 웃고 있지 않은지 확인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런 내 속을 지호가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눈치채주었으면 하는 이상한 갈망이 함께 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있어봤자 서로 불편해질 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호는 현관까지 나를 배웅하며 짧게 "조심히 가"라는 말을 남겼지만, 그 목소리에서 진심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둔 커터칼의 존재를 다시 떠올렸다. 필요 없다고, 이제는 그의 연인이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수백 번 되뇌었지만, 손은 자꾸만 가방 지퍼 쪽으로 움직였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초췌했고, 그 얼굴을 마주 보는 것조차 버거워 눈을 감아버렸다.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그가 나를 떠나려 한다면. 그 생각만으로도 손끝이 저릿하게 떨려왔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 답을 찾을 수 없어 나는 그저 가방끈을 꽉 움켜쥔 채 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해 방문을 열자, 책상 위에 놓아둔 노트가 펼쳐져 있는 게 보였다. 지호의 필체를 연습하던 페이지, 그의 마침표 찍는 방식과 획의 기울기를 그대로 따라 적은 흔적들이었다. 몇 달째 반복해온 연습이었지만, 아직도 그의 손끝에서 나오는 것 같은 자연스러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게 스스로도 답답했다. 그런데 그 노트 옆에, 낯선 손길이 다녀간 흔적이 있었다. "하윤아."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재빨리 노트를 덮었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엄마의 표정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엄마의 손에 들린 건 다름 아닌 내 가방이었고, 그 안에서 삐죽 튀어나온 커터칼의 손잡이가 형광등 불빛 아래 서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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