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대박났는데 엄마가 이상하다

2화

신촌역 3번 출구 앞은 평소와 다름없이 사람들로 북적였고, 준서는 인파를 헤치며 임무가 지정한 중고서점을 찾기 위해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퇴근 시간과 겹친 탓인지 역 앞은 발 디딜 틈도 없었는데, 어깨를 부딪히며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준서는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춰야 했고, 그럴 때마다 손목에 채워진 시계 대신 허공에 떠 있는 지도 같은 것을 힐끔거렸다. '분명 이쪽이라고 했는데.' 큰길에서 갈라진 골목은 걸어 들어갈수록 점점 좁아졌고, 오래된 상가 건물들 사이로 낡은 전선이 축 늘어진 채 이어져 있었으며, 인적도 뜸해져서 조금 전까지의 소음이 마치 다른 세계의 일처럼 아득하게 멀어졌다. 낡은 간판에 '문일서림'이라 적힌 가게는 겉보기에도 반세기는 족히 버텨온 듯한 낡은 목조 건물이었는데, 페인트가 벗겨진 나무 문틀과 금이 간 유리창, 그리고 그 틈으로 삐죽 튀어나온 책 모서리들이 이 가게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곰팡이와 종이 냄새가 뒤섞인 특유의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끼이이익··· 낡은 경첩이 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는데도 가게 안 풍경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주인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고, 손님이 들어왔는데도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천장까지 닿을 듯한 책장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그 사이사이 바닥에는 정리되지 못한 책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어서 발을 옮길 때마다 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이 많은 책 중에서 대체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준서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시스템이 알려준 대로 구석의 헌책 더미 쪽으로 다가가, 먼지가 뽀얗게 앉은 책들을 하나씩 헤집기 시작했다. '대체 만년필이 왜 이런 책 더미 사이에 있다는 거지.' 의문을 품은 채로도 손을 멈추지 않았는데, 낡은 표지들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고, 몇몇 책은 손을 대는 순간 종이가 부스러질 듯 위태로워서 준서는 조심스레 그것들을 옆으로 옮겨야 했다. 다섯 번째, 열 번째, 열다섯 번째 책을 넘겨도 별다른 것이 나오지 않았고, 준서의 이마에는 서서히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설마 임무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그런 불안이 스쳐 지나갈 때쯤, 스무 번째 책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달그락. 낡은 문학전집 사이에서 무언가 단단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고, 준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책들을 옆으로 밀어내다가 검은 벨벳 케이스 하나를 발견했다. '찾았다.' 케이스는 겉보기에도 꽤 오래된 물건인 듯 가죽 표면이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이 결코 값싼 물건은 아니라는 느낌을 주는 묘한 무게감이 있었다. 케이스를 열자 안에는 손잡이가 자개로 장식된 만년필 한 자루가 얌전히 놓여 있었는데, 언뜻 봐도 흔한 물건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 만큼 정교한 세공이었다. 자개의 무늬는 빛을 받을 때마다 색이 미묘하게 달라졌고, 펜촉 끝에는 아주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준서의 눈으로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거였구나.' 그는 만년필을 조심스레 꺼내 들고 주인 앞으로 다가갔고, 노인은 그것을 힐끗 보더니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 트로트를 흥얼거리던 늙은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고, 라디오 소리조차 갑자기 멀게 느껴질 만큼 가게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듯했다. "이걸 어디서···" 노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는데, 그 반응만으로도 이 물건의 값어치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노인의 손끝이 만년필의 몸통을 따라 조심스럽게 훑어 내려갔고,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린 자식을 다시 만난 사람처럼 눈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뭐야, 왜 저렇게 반응이 격해.' 준서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얼굴을 유지한 채, 노인이 만년필을 이리저리 살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노인은 한동안 만년필을 이리저리 살피며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이내 낮은 한숨을 내쉬며 금고에서 두툼한 현금 다발을 꺼내왔다. 낡은 철제 금고가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그 안에서 꺼낸 지폐 다발은 은행에서 막 나온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건··· 오래전에 잃어버린 물건일세. 값은 후하게 쳐주겠네." 노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미묘한 떨림이 남아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이미 예전의 무표정으로 돌아가 있어서 준서는 그 짧은 순간의 흔들림이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건네진 돈을 세어보니 정확히 천만 원, 시스템이 예고한 그대로였다. '이 정도면 시스템 말대로 딱 맞아떨어지는군.' 준서는 지폐를 세는 척하며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노인의 눈빛에 남아 있던 그 알 수 없는 감정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 준서는 서점을 나서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는데, 그것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이 세상의 이면에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른 규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데서 오는 서늘한 흥분이었다. 골목을 걸어 나오는 동안에도 노인의 떨리던 목소리와 만년필을 어루만지던 손끝의 감촉이 잔상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었고, 준서는 그 만년필이 대체 어떤 사연을 품고 있었을지 궁금해졌지만 굳이 캐물을 이유는 없었다. '뭐, 나야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니까.' 골목을 벗어나 대로변에 서자, 허공에 다시 익숙한 창이 떠올랐다. 위이잉··· 작게 진동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나타난 창은 이제는 익숙해질 만큼 여러 번 마주한 것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문장들은 매번 준서의 심장을 다르게 뒤흔들었다. [임무 완료.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현재 보유 자산 : 10,032,000원.] 숫자를 확인한 순간 준서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는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통장 잔고가 두 자릿수 만 원 단위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 숫자는 거의 비현실적인 것이었고, 그런 낙차 때문에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크크크, 이거 진짜 미쳤네.' 그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뒤이어 떠오른 문장이 그의 표정을 굳게 만들었다. [경고 : 인과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숙주가 얻은 것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릅니다.] [대가는 예고 없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준서의 손끝이 미세하게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고, 방금까지의 들뜬 기분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문장이 사라지자 창 전체가 서서히 흐려지더니,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가장 가까운 곳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 문장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준서는 애써 별일 아닐 것이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창밖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류장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몇 번이나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지만, 그의 눈은 화면이 아니라 그 너머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설마 돈을 잃는다는 뜻인가. 아니면···' 가족을 떠올리자 등줄기가 서늘해졌고, 준서는 황급히 그 생각을 지워버리려 애썼다. '아니야, 별거 아닐 거야. 그냥 경고 문구겠지.' 버스가 도착하고 자리에 앉자,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익숙한 건물들이 오늘따라 조금씩 낯설게 느껴졌다. *** 버스가 익숙한 동네 어귀에 접어들자 해는 이미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고, 골목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는 풍경이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버스에서 내린 준서는 평소와 다름없는 걸음으로 골목을 걸었지만, 발걸음 속도가 미묘하게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늘 지나던 편의점과 세탁소, 그리고 낡은 슈퍼 간판까지도 모든 게 그대로였는데도 준서는 왠지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별일 없겠지. 진짜 그냥 경고일 뿐일 거야.' 몇 번이나 되뇌면서도 심장은 자꾸만 빠르게 뛰었고, 그것이 단순히 언덕을 오르는 탓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스스로도 구분할 수 없었다. 집 앞 계단을 오르며 그는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는데, 그 순간 문 안쪽에서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소리에 손이 멈췄다. 낮고 갈라진, 사람의 숨소리 같은 것이었다. ···흑, ···흐윽···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참으려다 실패한 울음소리처럼 들렸고, 준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문에 이마를 가까이 가져갔다. 준서는 숨을 삼키며 귀를 기울였고,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것이 방금 시스템이 경고했던 '가장 가까운 곳의 대가'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준서는 차마 손잡이를 돌릴 용기조차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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