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준서가 현관 앞에 도착한 것은 평소보다 이십 분쯤 이른 시각이었는데, 오늘따라 유독 일이 빨리 끝난 탓에 별다른 생각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을 뿐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걸어오는 동안에도 그는 그저 저녁으로 뭘 먹을지, 아버지는 오늘도 늦게 들어오실지 하는 사소한 것들을 떠올리고 있었고, 그런 평범한 하루의 끝자락이 조금 뒤 완전히 뒤틀려버릴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현관문에 손을 얹은 채로 준서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는데,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는 분명 사람의 숨소리였으나 그 리듬이 평소 집안에서 들을 법한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뭐지, 이 소리는.'
처음에는 텔레비전 소리인가 싶어 무심히 넘기려 했으나, 문에 귀를 가까이 대는 순간 그것이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숨소리는 짧게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했고, 그 사이사이에 미묘하게 억눌린 떨림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설마 도둑이 든 건가.'
순간적으로 떠오른 불안한 생각에 그는 조심스럽게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눌렀고, 삑삑거리는 전자음이 유독 크게 울리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는데, 그것이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예감한 탓인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철컥.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은 텅 비어 있었고, 소리는 안쪽 부모님의 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텔레비전은 꺼져 있었고, 소파 위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부엌의 불빛조차 켜져 있지 않았다. 오직 복도 끝, 안방 문 아래로 희미한 빛만이 새어 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엄마 혼자 계신가.'
준서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신발을 벗었다.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건 아닐까, 어디 아프신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기에, 그는 걸음을 서둘렀다.
조용히 신발을 벗고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그는, 방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문틈은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으나,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빛과 소리는 이상하게도 선명했다.
"흐응···"
짧고 억눌린 신음이 문틈 사이로 새어 나왔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닫는 순간 준서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머니, 정미경의 목소리였다.
'설마, 아니겠지.'
그는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발은 이미 문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고, 손끝은 저도 모르게 문틈을 조금 더 벌리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당장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이성적인 판단이 소리 없이 울려대고 있었으나, 몸은 그 명령을 조금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아니야, 이건 뭔가 착각일 거야. 몸이 아프신 걸 수도 있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애써 합리적인 이유를 찾으려 했으나, 그 노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말았다.
침대 위에 반쯤 걸쳐 앉은 정미경이, 원피스 자락을 허벅지까지 밀어 올린 채로 스스로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방 안의 조명은 은은한 스탠드 불빛 하나뿐이었고, 그 노란 빛이 그녀의 하얀 살결 위로 부드럽게 번져 있었다.
감긴 눈꺼풀 아래로 미세하게 떨리는 속눈썹과, 이따금씩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채우고 있었고, 그 광경은 준서가 알던 어머니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낯설고도 은밀한 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평소의 정미경은 항상 단정한 옷차림으로 아침을 준비하고, 저녁이면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저 흔한 가정주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그녀는 그런 익숙함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쿵.
심장이 마치 무언가에 부딪힌 듯 크게 뛰었고, 준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로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고, 손끝은 문틈에 걸린 채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건··· 이럴 수가.'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린 그 짧은 순간, 정미경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처음에는 흐릿하던 시선이 점차 또렷해지며 문 쪽을 향했고, 그 끝에 서 있는 아들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그녀의 손이 우뚝 멈췄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부딪혔다.
방 안의 공기가 마치 얼어붙은 듯 정지했고, 오직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째깍째깍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그 단조로운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것은 아마도 두 사람 모두 숨소리를 완전히 죽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준서는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과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동시에 뒤섞여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다리는 마치 바닥에 뿌리를 박은 것처럼 굳어 있었고, 입술은 벌어졌으나 그 사이로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수십 가지의 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스쳐 지나갔다. 죄송하다는 말, 아무것도 못 봤다는 말, 그저 잘못 들어왔다는 말.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지금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정미경 역시 미동도 없이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표정에서 예상했던 당혹감이나 수치심 같은 것은 이상하게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눈빛에는 무언가 다른 감정이, 이를테면 오래도록 숨겨두었던 것이 마침내 드러났다는 듯한 기묘한 안도감 같은 것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준서는 이상하게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우연히 마주친 실수가 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날 일이 이제야 벌어진 것 같다는,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그를 휘감았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이, 준서에게는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방 안의 시간이 마치 늘어진 테이프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고, 그 사이 준서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기억들이 뒤엉켜 스쳐 지나갔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던 기억, 학교에 데려다주던 뒷모습, 그리고 지금 눈앞의 낯선 여인의 모습까지.
그가 뒷걸음질을 치려는 순간, 정미경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며 낮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준서야."
그 한마디에 담긴 낮고 부드러운 울림이 그의 발목을 그대로 붙잡아버렸다.
그 목소리는 평소 그를 부를 때와 다르지 않았으나, 지금 이 순간에는 이상하게도 다른 무게를 지니고 그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마치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한, 혹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한 그런 울림이었다.
준서는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저 어머니의 눈을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던 은은한 불빛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여전히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고, 그 정적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