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냉장고 모터 소리가 웅웅거렸다.
삼각김밥 진열대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손등을 스쳤다.
새벽 세 시, 편의점 안은 나 혼자였다.
형광등 불빛 아래 진열된 도시락들이 죄다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착각이다.
사물이 사람을 볼 리 없다.
그래도 그런 기분이 드는 새벽이 있다.
박곤이 창고에서 담배 케이스를 옮기며 투덜거렸다.
쿵, 쿵, 상자 부딪히는 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왔다.
"도현아, 유통기한 지난 거 빼놔라."
붉은 피부에 뾰족한 귀, 박곤은 고블린인데 인간 흉내를 꽤 잘 낸다.
적어도 강남 한복판에서 편의점 매니저 노릇을 할 정도로는.
피부색은 파운데이션으로, 귀는 늘 야구모자로 가리고 다닌다.
가끔 모자가 벗겨지면 손님들이 코스프레냐고 묻는다는데, 박곤은 그럴 때마다 "네, 맞아요" 하고 넘긴다고 했다.
편리한 세상이다.
"네."
짧게 대답하고 삼각김밥을 하나씩 검사했다.
날짜 스티커를 확인하고, 지난 것들을 따로 빼서 바구니에 담았다.
이게 내 밤이다.
반엘프라서 야간에 눈이 더 잘 보인다는 거, 이 일자리 말고는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었다.
사실 반엘프라는 것 자체가 그렇다.
인간 사회에 완전히 섞이지도 못하고, 엘프 쪽에서도 반쪼가리라고 부르는.
편의점 야간 알바 정도가 딱 맞는 자리였다.
박곤이 힐끗 쳐다봤다.
"너 요즘 표정이 왜 그래."
"그냥요."
그냥, 이라는 말로 넘어갈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걸 나도 안다.
박곤도 안다.
그래서 더 안 물어보는 거다.
고블린들은 겉보기와 다르게 눈치가 빠르다.
적어도 박곤은 그랬다.
독립.
그 단어를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곱씹었다.
강필호의 집에서 나온 지 반년.
여전히 그 이름이 붙은 계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웃겼다.
생활비 명목으로 매달 들어오는 돈, 거절하려 했는데 계좌 자체를 없앨 방법이 없었다.
강필호 쪽 변호사가 그렇게 만들어놨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나는 아직 그 사람의 그림자 안에 서 있었다.
편의점 알바비를 세어봐도, 강필호 계좌에 남은 돈보다 한참 적었다.
그래도 이 돈은 내 손으로 번 돈이라는 게 중요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박곤이 창고로 들어가고 나는 계산대에 남았다.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파직.
그러고는 다시 멀쩡해졌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울 밤은 늘 전압이 이상했다.
가끔 편의점 간판도 저 혼자 꺼졌다 켜졌다 했으니까.
계산대 옆 라디오에서 낮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사도 모르는 옛 가요, 박곤이 좋아하는 채널이었다.
손님 하나 없는 새벽, 노래 소리만 매장을 채웠다.
***
퇴근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골목은 조용했다.
가로등 불빛이 노랗게 번져 있었다.
걸음마다 아스팔트 냄새와 젖은 담배꽁초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편의점 유니폼 위에 걸친 패딩 속으로 새벽 공기가 스며들었다.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퍼졌다가 사라졌다.
발밑에서 자갈 몇 개가 밟혀 자그락 소리를 냈다.
익숙한 골목, 익숙한 소리들.
그때, 가슴 한가운데서 뭔가 뛰었다.
심장이 아니었다.
더 깊은 곳, 명치 아래쯤.
두근.
씨앗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런 생각이 스쳤다.
걸음을 옮기려는데 다시 왔다.
박동이 한 번 더 왔다.
두근.
이번엔 더 세게.
걸음을 멈췄다.
손끝이 저려왔다.
저림은 손목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손끝으로 되돌아갔다.
보라색.
손등 위로 옅은 보랏빛 잔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잘못 본 건가 싶어 손을 눈앞에 가까이 대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방금 본 게 조명 때문이었는지, 내 눈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뭐야."
혼잣말이 갈라져 나왔다.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게 낮았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잊으려 애썼던 그 방에서.
그 방을 떠올리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이 이렇게 쉽게 튀어나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가로등 불빛이 모래처럼 흩어졌다.
진짜로 모래처럼, 알갱이가 되어 바람에 날려가는 것처럼.
눈앞의 골목이, 담벼락이, 젖은 아스팔트가 전부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흩날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릎이 아스팔트에 닿기도 전에, 나는 이미 다른 곳에 있었다.
***
공기가 달랐다.
먼저 냄새가 왔다.
습기와 쇠, 그리고 어딘가에서 타는 듯한 오존 냄새.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천장이었다.
낮고,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난.
군데군데 물이 스며든 자국이 얼룩처럼 번져 있었다.
형광등 하나가 깜빡거렸다.
파직.
이번엔 아까와 달랐다.
이건 진짜였다.
아까 골목에서 본 깜빡임이 예고였다면, 이건 그 예고의 결과였다.
몸을 일으켰다.
손바닥에 닿는 바닥이 차가웠다.
금속이었다.
차갑다기보다는 온도 자체가 없는 느낌, 살에 붙는 듯한 냉기였다.
어딘가의 지하실, 아니 지하실보다 더 아래.
벽을 더듬으며 일어섰다.
벽면도 금속이었다.
표면에 미세한 요철이 있었다.
녹슨 부분을 손끝으로 문질러봤다.
가루가 부스러져 떨어졌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여기가 어디야."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 목소리만 낮은 천장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
부르르.
살아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익숙한 감각이었다.
이런 곳에서도 전파는 잡히는구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스쳤다.
메시지 한 통.
발신자 이름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이태준.
형이었다.
[네 자신을 증명해라. 상금 1만 달러. 서울 지하격투클럽 '흑야'. 초대장은 이미 발송됐다.]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걱정하지 마, 몸은 무사할 거야.]
다정한 문장과 서늘한 문장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게 이상했다.
형은 늘 그랬다.
손을 내밀면서 동시에 벼랑 쪽으로 미는 사람.
어릴 때도 그랬다.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준다면서 등을 밀어놓고, 넘어지면 웃었다.
그 웃음이 걱정 없어서 나오는 웃음인지, 재밌어서 나오는 웃음인지 한 번도 구분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화면을 몇 번이나 다시 켰다.
같은 메시지가 그대로 떠 있었다.
답장을 보내볼까 손가락을 움직였다가 멈췄다.
뭐라고 써야 할지 몰랐다.
"여기 어디야"라고 쓰는 것도, "장난치지 마"라고 쓰는 것도 다 웃길 것 같았다.
형한테는 늘 그랬다.
말이 통하는 것 같으면서 통하지 않는.
메시지를 다시 읽으려는데 통로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다각.
다각.
일정한 리듬, 사람의 것처럼 규칙적이었다.
그런데 뭔가 걸음이 너무 곧았다.
마치 관절이 기계로 되어 있는 것처럼.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빨라졌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벽에 등을 붙였다.
숨을 최대한 얕게 쉬었다.
어둠 속에서 실루엣이 천천히 커졌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고.
먼저 보인 건 손이었다.
손끝에서 옅은 붉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빛이 벽에 반사되어 통로 전체를 옅은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드디어 왔네."
낮고 걸걸한 목소리였다.
목소리에 뭔가 걸린 것처럼 갈라진 부분이 있었다.
사람 목소리라기보다는 짐승 울음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나는 벽에 등을 붙인 채 그 형체를 바라봤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칠 방향도, 도망칠 힘도 없었다.
다음 걸음에서 얼굴이 드러났다.
피부가 붉었다.
인간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