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라연이 손목을 들어 보였다. 금빛 사슬 문양이 여전히 살갗에 새겨져 있었지만, 어제보다 색이 한 톤 옅어져 있었다.
"조금씩 풀리고 있어."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였다. 세상 다 지친 어조인데도 그 말투에는 이상하게 안도가 섞여 있었다.
도윤은 반지하 방바닥에 앉아 그 손목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여전히 이름도 아이콘도 없는 회색 사각형이 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앱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믿기지 않는 물건이 그의 유일한 밥줄이자 인생을 망친 원흉이기도 했다.
방 안은 여전히 좁고 습했다. 곰팡이 냄새가 벽지 틈에서 배어 나왔고, 창문도 없는 탓에 낮인지 밤인지도 시계를 봐야 알 수 있었다. 그런 곳에 앉아 낯선 여자와 스마트폰 하나를 두고 인생 상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도윤은 새삼 기가 찼다.
"이 퀘스트라는 거, 정확히 어떻게 하는 겁니까." 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냥... 만나서 잘해주면 되는 겁니까?"
"그렇게 간단하면 좋았겠지." 라연이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숨을 내쉬는 소리에 가까웠다. "앱은 대상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보여줘. 잠들면."
"잠들면요?"
"꿈으로." 그녀가 말했다. "예지몽 같은 거야. 대상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정확히는 아니고, 조각으로."
도윤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지난 며칠간 자신이 꿨던 이상한 꿈들이 단순한 스트레스성 악몽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낯선 얼굴, 낯선 골목, 낯선 목소리들이 뒤섞인 꿈. 그게 앱의 작동이었다는 것이다.
"그럼 조각으로 보여준다는 게, 편집도 안 되고 순서도 없다는 소리네요."
"그런 셈이지." 라연이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누가 친절하게 다 설명해줄 거라고 기대했으면 그건 네 착각이었어."
"착각한 적 없습니다." 도윤이 억울한 듯 대꾸했다. "그냥... 확인하는 거예요."
"확인은 자고 나서 해." 그녀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럼 오늘 자면 또 보이는 겁니까."
"아마." 라연이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운이 좋으면."
운이 좋으면, 이라는 표현이 어딘가 불길하게 들렸지만 도윤은 굳이 따지지 않았다. 이미 그 말투에서 더 캐물어봐야 소용없다는 걸 배운 지 며칠째였다. 그날 밤 그는 유독 일찍 이불을 뒤집어썼다. 마치 숙제를 빨리 끝내면 상이라도 받을 것처럼.
***
꿈속에서 도윤은 낡은 편의점 유리문 앞에 서 있었다.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하얗고 차가웠다. 그 아래, 짧은 머리를 한 소녀가 명찰을 만지작거리며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서지우였다. 학교에서 도는 소문으로는 가출한 문제아, 밤마다 클럽을 전전하며 어른들 속을 뒤집어놓는 날건달이라 했다. 그런데 꿈속의 소녀는 편의점 유니폼을 손에 쥔 채 몇 번이고 옷깃을 만지고, 거울 앞에서 인사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소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떨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매번 미묘하게 다른 억양으로 같은 인사를 반복했다. 마치 어느 버전이 가장 어른스럽게 들릴지 시험해보는 것 같았다. 넷째 번에는 목소리가 갈라졌고, 소녀는 눈을 질끈 감고 작게 욕설을 뱉었다.
장면이 바뀌었다. 좁은 고시원 방. 이불 하나와 캐리어 하나가 전부인 공간에서 소녀는 휴대폰 녹음 앱을 켜고 노래를 불렀다. 서툴지만 절박한 목소리였다. 벽이 얇아서 옆방에서 인기척이 들릴 때마다 소녀는 목소리를 낮췄다가, 조용해지면 다시 높였다.
노래가 끝나자 소녀는 곧바로 재생 버튼을 눌러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래서 되겠어..." 혼잣말이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이불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었다. 어깨가 잠깐 들썩였는데, 우는 건지 그냥 한숨을 쉬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캐리어 옆에는 편의점 유니폼이 곱게 접혀 있었다. 마치 그것이 소녀가 가진 유일하게 소중한 물건인 것처럼.
소문 속의 서지우와 꿈속의 서지우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문제아라던 소녀는 실은 편의점 알바 면접 하나에 벌벌 떠는, 고시원 구석에서 혼자 노래 연습을 하는 열여덟 소녀였다.
도윤은 그 장면에서 깨어났다. 땀에 젖은 이불을 걷어내며 벽에 등을 기댔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꿈치고는 지나치게 선명했고, 지나치게 슬펐다.
"소문이랑 다르잖아." 그가 중얼거렸다.
라연이 어느새 방 한쪽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잠을 자지 않는 것처럼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도윤은 처음에는 그게 소름 끼쳤지만, 이제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게 됐다. 어차피 그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으니까.
"이제 알겠어?" 그녀가 물었다. "세상이 아는 얼굴과 실제 얼굴은 다를 때가 많아."
"근데 왜 걘 그렇게 소문이 난 겁니까? 노래 연습이나 하고 면접 앞두고 벌벌 떠는 애가, 왜 클럽 죽순이가 됐어요?"
"그건 네가 만나서 알아내야 할 몫이지." 라연이 무심하게 답했다. "나는 조각만 보여줄 뿐이야. 이야기를 완성하는 건 네 일이고."
도윤은 그 말이 서지우만을 향한 게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지금은 눈앞의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만나야겠네요." 그가 결심한 듯 말했다. "이번에는 확실히요."
"확실히, 라고?" 라연이 되물었다. 그 말투에 왠지 장난기 같은 게 섞여 있었다.
"저번처럼 헛다리 짚는 거 말고요." 도윤이 얼른 덧붙였다. 지난번 퀘스트에서 겪었던 낯 뜨거운 실수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라연이 옅게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이 어딘가 슬퍼 보였다는 사실은, 그때의 도윤은 미처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