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빚 1억, 하렘 앱이 떴다

4화

다음 날 아침, 도윤은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앱을 켰다. 밤새 뭔가 바뀌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도 이제는 일종의 의식이 되어 버렸다. 화면을 몇 번 넘기던 도윤의 손가락이 문득 멈췄다. 메인 화면 아래쪽, 원래는 텅 비어 있던 자리에 흐릿한 회색 아이콘이 하나 새로 생겨 있었다. 서랍 모양이었다. 어제까지는 분명히 없던 것이었다. '이게 뭐지.' 도윤은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여전히 있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라연 씨." 도윤이 화면을 라연에게 들이밀었다. "이거 뭡니까." 라연은 아직 잠에서 덜 깬 얼굴로 화면을 받아들었다. 몇 초간 뜸을 들이더니,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모르겠어." "모른다고요?" 도윤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앱에 대해서만큼은 라연이 모르는 게 없을 줄 알았다. 사흘 만에 알게 된 사이였지만, 그 정도 믿음은 이미 생겨 있었다. "나도 여기 계약된 존재일 뿐이야."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앱의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야. 이것도 처음 보는 거고." 처음 본다는 말이 오히려 더 무섭게 들렸다. 라연이 모르는 게 있다는 건, 이제부터 벌어질 일은 순전히 도윤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도윤은 잠시 화면을 노려보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아이콘을 눌렀다. *** 화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방 한쪽 벽이 스르르 열렸다. 반지하 방의 낡은 시멘트벽이 마치 셔터처럼 위로 말려 올라갔다. 가벽도 아니고 진짜 콘크리트 벽이 저렇게 움직이는 게 가능한가, 도윤은 물리 법칙이 통째로 배신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벽 뒤로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좁은 창고였다. 원래 이 방에는 그런 공간이 없었다. 도윤은 이 방에서만 이 년을 살았다. 벽 뒤에 뭐가 있는지는 자기가 제일 잘 알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건 분명히 처음 보는 공간이었다. 안쪽 벽에는 낯선 문양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게 뭐야..." 도윤이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라연이 그 공간에 성큼 들어서더니 손끝으로 벽의 문양을 훑었다. 손가락 끝이 문양을 따라 움직이는 동안, 그녀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도윤은 그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라연은 어떤 상황에서도 저런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거." 그녀가 낮게 말했다. "내 사슬에 있는 것과 같은 문양이야." 도윤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라연의 손목을 힐끗 쳐다봤다. 언제나 그 자리에 감겨 있는 낡은 사슬. 자세히 본 적은 없었지만, 이제 와서 보니 표면에 새겨진 무늬가 낯설지 않았다. "그럼 이 공간이랑 라연 씨 손목 사슬이 관련 있다는 거예요?" "모르겠어." 라연이 또 그렇게 답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았다.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지친 어조 안에, 처음으로 옅은 불안이 섞여 있었다. 도윤은 그 불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그냥 창고 안을 계속 둘러보는 척했다. *** 창고 안쪽 선반에는 낡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무 재질에, 모서리가 다 닳아 있는 상자였다. 열쇠 구멍 하나 없이 뚜껑만 덮여 있는 걸 보고 도윤은 조심스레 다가갔다. "만져도 되는 거예요?" 그가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라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모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도윤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오래된 지폐 몇 장과 작은 열쇠, 그리고 손바닥만 한 수첩이 들어 있었다. "돈이잖아." 도윤이 눈을 크게 떴다. 지폐를 세어 보니 액수는 크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십 원짜리 하나도 아까운 처지였다. 통장 잔고가 네 자리 숫자를 밑도는 사람에게 이 정도 돈은 결코 작지 않았다. 작은 열쇠는 용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표시조차 없었다. 도윤은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돌려 봤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수첩을 펼치자 낯선 필체로 짧은 메모들이 적혀 있었다. 날짜도, 이름도 없이 그저 단편적인 문장들뿐이었다. '세 번째 계약자는 실패했다.' '풀리는 속도가 느리다.' '조심해야 한다.' 도윤은 그 메모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읽을수록 문장 하나하나가 목에 걸리는 기분이었다. "세 번째... 계약자?" 그가 라연을 돌아봤다. "그러면 저 전에도 이 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거예요?" 라연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고 벽에 새겨진 문양을 오랫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라연 씨."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도윤은 재차 부르려다가 그만뒀다. 그 침묵이 어떤 대답보다도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어봐서 좋을 게 없는 질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그날 밤, 도윤은 그 상자에서 나온 돈을 세어보며 한숨을 쉬었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당장 이번 달 방값에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편의점 알바로 채워야 했던 구멍이 조금이나마 줄어든 셈이었다. 수첩은 방바닥에 그대로 펼쳐 둔 채였다. 세 문장 말고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그 수첩을 도윤은 몇 번이나 다시 훑어봤다. 뭔가 더 있지 않을까 해서 페이지를 넘겨 봤지만, 나머지는 전부 백지였다. "이 공간, 계속 열려 있는 거예요?" 그가 물었다. "아마." 라연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으며 말했다. "아마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열려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런 뜻이야." 라연이 태연하게 답했다. 도윤은 저 태연함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해졌다. 자기라면 지금 이 순간 방바닥에 주저앉아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조심해." 그녀가 말을 이었다. "여기서 나온 물건들, 전부 누군가가 남긴 유산이야. 그리고 유산은 대부분 좋은 이유로 남겨지지 않아." "좋은 이유가 아니면요?" "보통은, 남길 수밖에 없어서 남기는 거지. 급하게. 도망치듯이." 도윤은 그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만은 정확히 느꼈다. 세 번째 계약자는 실패했다는 문장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실패했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도윤은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다. 그리고 그 서늘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확히 그가 예상한 방향으로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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