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는 엔딩은 바꾸기로 했다

4화

이른 아침, 숲의 초입에 두 사람이 섰다. 하늘은 아직 완전히 밝지 않았다. 산 능선 위로 옅은 회색빛이 번지고 있었다. 공기는 차가웠다. 입김이 하얗게 퍼졌다가 금세 사라졌다. 서예린은 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검집은 낡았지만 손잡이는 손에 익은 흔적이 뚜렷했다. 지훈은 목검이 아닌 진검을 들고 있었다. 서예린이 저택 창고에서 꺼내온 것이었다. 칼날에 아침 빛이 스치자 차가운 은빛으로 번쩍였다. 지훈은 검을 두 손으로 쥐어보았다. 무게가 낯설었다. 목검보다 훨씬 묵직했고, 손끝에 전해지는 냉기도 달랐다. "무겁네요." "익숙해질 거예요." "익숙해질 시간이 있을까요." 서예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허리에 찬 자신의 검을 한 번 확인하듯 손으로 짚었다. "이건 방어용이에요. 절대 앞장서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제 뒤에서, 딱 세 걸음 거리를 유지해요. 그보다 가까우면 제가 움직일 때 방해가 되고, 그보다 멀면 제가 지켜줄 수 없어요."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걸음. 그 숫자를 마음속으로 몇 번 되새겼다. 두 사람은 숲으로 들어섰다. 숲은 조용했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훈은 그 침묵이 이상하다는 것을 곧 느꼈다. 게임 속에서 이런 정적은 항상 무언가의 전조였다. 필드에 들어섰을 때 몹 스폰이 없는 구간, 혹은 보스룸 직전의 완충 지대. 지훈은 그 감각을 떠올리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발밑의 흙은 젖어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발 바닥에 진흙이 달라붙었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빛이 얼룩처럼 흔들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얼룩들도 함께 움직였다. 서예린이 앞장서서 걸었다. 그녀의 걸음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지훈은 그녀의 발끝이 땅에 닿는 방식을 다시 관찰했다. 발바닥 전체가 아니라 앞부분으로 무게를 받는 걸음. 언제든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자세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그저 조용히 걷는 사람으로 볼 것이다. 그런데 지훈은 그녀의 무릎이 살짝 굽어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언제든 튀어나갈 수 있게 낮춰진 중심. 숲을 걷는 것이 아니라, 숲 안에서 싸울 준비를 하며 걷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십 분쯍 지났을 때, 서예린이 걸음을 멈추고 손을 들었다. 지훈도 따라 멈췄다. "뭔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계속 가요." 다시 걸음이 이어졌다. 지훈은 그녀가 무엇을 느낀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들은 오래된 것들이었다. 몸통이 굵고, 이끼가 두껍게 덮여 있었다. 사람이 자주 드나든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삼십 분쯍 걸었을 때, 서예린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예요." 지훈은 그녀 옆에 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나무 한 그루가 통째로 하얗게 굳어 있었다. 껍질도, 잎도, 심지어 주변의 풀까지 서리가 낀 것처럼 하얗게 얼어 있었다. 지훈은 손을 뻗어 그 나무의 표면을 만져보고 싶었지만, 서예린이 먼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만지지 말아요." "왜요." "아직 냉기가 남아 있을 수도 있어요." 지훈은 손을 거두었다. 나무 옆의 바닥에는 커다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발톱 흔적까지 선명했다. 발자국 하나의 크기가 지훈의 몸통만 했다. 소금기 같은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젖은 흙냄새. 낙엽이 썩는 냄새. 나무껍질에서 풍기는 옅은 송진 냄새. 그런데 지금 코끝에 닿은 것은 분명 그것들과 다른 냄새였다. 차갑고 비릿한, 짐승과는 다른 냄새. 지훈은 그 냄새를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세계에서는 처음이었다. 게임 속 필드에서, 몹 스폰 지점 근처에서 나던 특유의 이펙트 냄새와 비슷했다. 그 생각이 들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서예린이 나무 앞에 무릎을 꿇고 발자국을 살폈다. 손가락으로 발자국의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짚었다. 흙이 살짝 무너져 내렸다. "이건..."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뭔가요." "A급 이상." 지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확실한가요." "이 정도 크기의 발자국을 남기는 건, 흔한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 결빙 흔적." 그녀는 나무를 다시 한 번 올려다보았다. "브레스 계열 마수예요." 지훈은 침을 삼켰다. 게임 지식이 다시 그의 머릿속에서 경보음을 울리고 있었다. 마골. 곰의 몸통, 용의 두부, 청백색 브레스. 원작에서 이 조합은 하나뿐이었다. 등급은 A. 서식지는 북쪽 산악 지대. 출현 시기는 게임 중후반, 특정 이벤트 이후. 지금은 그 어느 것도 맞지 않았다. "선생님, 마골이라고 아세요." 서예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지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 원작에서 마골이라는 이름은 게임 안에서만 등장하는 고유명사였다. 이 세계에서 그 이름이 실제로 쓰이고 있다는 것은, 서예린도 어떤 경로로든 그 존재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디서 들었어요." 서예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평소의 부드러운 표정과는 다른, 조사관 같은 눈빛이었다. "...예전에 책에서 본 것 같아요." "어떤 책이요." "기억이 잘 안 나요. 오래전에 읽어서." 서예린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시선이 나무들 사이 어둠을 하나씩 훑고 지나갔다. "마골은 원래 이 지역에 나타날 마수가 아니에요." "어디에 있어야 하는데요." "더 북쪽. 인간 거주지와 먼 산악 지대. 여기까지 내려온 건 이상해요." "왜 내려왔을까요." "먹이가 부족했거나, 영역을 빼앗겼거나. 혹은..." 그녀는 말을 멈췄다. "혹은 뭐요." "모르겠어요. 짐작일 뿐이에요." 지훈은 그 말을 들으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원작 타임라인과 다르게 등장한 것뿐만 아니라, 서식지조차 벗어나 있었다. 이 세계는 지훈이 알던 게임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사실이 주는 불안감은 마골이라는 존재 자체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게임 지식이 그의 유일한 무기였다. 그런데 그 지식이 더 이상 정확하지 않다면, 그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었다. "돌아가야 해요." 서예린이 말했다. "이 근처에 마골이 있다면, 우리 둘로는 상대할 수 없어요." "저택으로 돌아가서, 누구에게 알려야 하나요." "기사단. 아니면 사냥꾼 조합. 이 정도 등급이면 최소 다섯 명 이상의 파티가 필요해요."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걸음을 돌렸다. 그 순간, 땅이 흔들렸다. 둥— 둥— 낮고 무거운 소리가 발밑에서 울렸다. 나뭇가지에서 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지훈은 발밑에서 전해지는 진동을 온몸으로 느꼈다. 무릎이 살짝 꺾였다. 서예린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검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뛰어요." 두 사람은 몸을 돌려 달렸다. 숲의 나무들이 뒤로 흘러갔다. 지훈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발이 걸리고, 나뭇가지가 얼굴을 스쳤다. 이마에 가느다란 상처가 났지만 통증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둥—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훈은 달리면서도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소리의 간격이 짧아지고 있었다. 처음엔 몇 초 간격이었던 것이 이제는 거의 붙어서 울렸다. 그것은 마골이 속도를 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발밑의 나무뿌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지훈의 발끝이 걸렸다. 몸이 앞으로 쏠렸다. "조심해요!" 서예린이 그의 팔을 잡아 균형을 잡아주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그녀의 손은 흔들림이 없었다. 지훈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지 말아야 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나무 사이로, 거대한 형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곰을 닮은 거대한 몸통. 검은 털이 곤두서 있었고, 몸통을 움직일 때마다 나무들이 옆으로 밀려나며 부러졌다. 그 위에 얹힌 것은 곰의 것이 아니었다. 길게 뻗은 주둥이, 비늘로 덮인 얼굴, 세로로 갈라진 노란 눈동자. 용의 두부였다. 숨이 멈췄다. 지훈의 발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두 다리가 마치 땅에 뿌리를 박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서예린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멈추지 말아요!" 지훈은 다시 달렸다.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는 인간의 두 다리로는 도저히 벌어지지 않는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숲의 나무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지끈, 하는 소리가 연속으로 이어졌다. 마치 거대한 손이 성냥개비를 부러뜨리는 것 같았다. 지훈의 폐가 타는 듯 아팠다. 다리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그는 게임 속에서 이런 도주 시퀀스를 수십 번 겪어봤지만, 그때는 화면 속 캐릭터가 대신 뛰었다. 지금은 그의 몸이 직접 뛰고 있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렸다. 서예린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검을 뽑았다. 칼날이 아침 빛을 받아 번쩍였다. "먼저 가요!" "선생님 혼자는 안 돼요!" "명령이에요, 먼저 가요!" 지훈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원작 지식이 그의 머릿속에서 다시 경보를 울렸다. 마골의 A급 등급, 서예린 혼자로는 상대할 수 없는 전력차. 하지만 지훈에게는 스킬도, 레벨도, 실전 경험도 없었다. 그의 손에 들린 진검이 갑자기 너무나 가벼우면서도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이 검을 들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는 알지 못했다. "선생님이 위험해지면 저도 어차피 죽어요! 혼자 도망칠 방법이 없다고요!" 서예린은 그를 잠깐 바라보았다. 그 시선 속에 짧은 갈등이 스쳤다. 나뭇잎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곰 같은 앞발이 땅을 짚었다. 발톱이 흙을 깊게 파고들었다. 몸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냉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마치 여름과 겨울이 한 몸에서 동시에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노란 눈동자가 두 사람을 향해 돌아갔다. 지훈은 그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손끝이 완전히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마골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주둥이 안쪽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 안쪽에서, 청백색 빛이 응축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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