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귀한 몸인데 왜 가정부라니

1화

여자가 남자보다 귀한 세상에 태어났다. 그런데 나는 지금 걸레를 빨고 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 이세계 전생물이라면 응당 나는 침대에 누워서 시녀 다섯 명한테 발가락 마사지나 받고 있어야 정상 아닌가. 적어도 내가 전생에 밤새 읽던 웹소설들은 다 그랬다. 남주는 태어나자마자 대공가 도련님이거나, 최소한 몰락한 귀족가의 늦둥이 아들 정도는 됐다. 근데 나는 그냥 하안촌 촌구석에서 걸레를 빠는 열여섯 살짜리다. 장르가 다른가? 촤악! 걸레를 빨래통에 헹구자 흙탕물이 튀었다. [생활 스킬 '빨래의 정석'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숙련도 따위 안 올라도 되니까 누가 나 대신 좀 해줬으면 좋겠다. 근데 또 이게 웃긴 게, 숙련도 오르는 거 볼 때마다 묘하게 손맛이 있다. 게임에서 레벨업 알림 뜨면 괜히 기분 좋은 그 느낌 있지 않나. 딱 그거다. 현타는 오는데 도파민은 나온다. 이게 사람 병신 만드는 구조라는 걸 알면서도 못 끊는다. 내 이름은 이도현. 올해로 열여섯 살, 하안촌이라는 촌구석에서 나고 자란 이 세계 원주민이다. 원주민인데 머릿속엔 전생의 기억이 고스란히 들어있다는 게 함정이지만. 전생엔 서울 반지하 자취방에서 8년을 굴러먹은 자취 9년 차 대학생이었다.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데는 도가 텄지만, 정작 연애는 한 번도 못 해본 채 트럭에 치여 죽었다. 그 트럭 기사님이 지금 뭐 하고 계실지 가끔 궁금하다. 저 때문에 트라우마라도 안 생기셨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눈을 떠보니 청연국이라는 나라의 하안촌, 이 지지리도 촌스러운 마을의 갓난아기였다. 처음 눈 떴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뭐였냐면, "아, 시야가 왜 이렇게 낮지"였다. 그다음 든 생각은 "설마 나 갓난아기냐"였고.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청연국은 한마디로 여성 상위 사회다. 남자가 귀하다. 왜 귀하냐면, 이 나라는 여자아이 열 명 중에 남자아이가 하나 태어날까 말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국보급 대우를 받는다. 일 안 시키고, 밥도 알아서 챙겨주고, 심지어 학당에서도 여자애들이 남자애 가방을 들어주는 게 국룰이다. 심하면 남자애 신발 끈까지 대신 묶어주는 애들도 봤다. 처음 그 광경 봤을 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와, 이거 완전 개꿀 세계관인데?' 근데. 그런데 나만 이 모양이다. "도현아, 또 걸레 빨아?"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지나가다 혀를 찼다. "아유, 저 집 아들내미는 도대체 왜 저러나 몰라. 서영이가 뭐 시켰나?" 엄마 이름까지 들먹이는 참견이었다. 엄마는 지금 밭일 나가고 없는데. "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이 말을 벌써 백 번째 하는 것 같다. 아주머니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더니 가버렸다. 가면서 옆집 아주머니한테 뭐라고 소곤거리는데, 딱 들어봐도 "쟤 좀 이상하지" 이 뉘앙스였다. 그럴 만도 하다. 여기 기준으로 보면 나는 스스로 재벌집 도련님 자리를 걷어차고 파출부를 자처하는 놈이니까. 이해가 안 가는 게 당연하다. 이 세계 남자애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사는 게 정상이니까. 근데 나는 전생 기억 때문에 손이 먼저 나간다. 방바닥에 먼지가 보이면 눈이 씰룩거리고, 설거지통에 그릇이 쌓여있으면 심장이 벌렁거린다. 직업병이다, 이건. 죽어서도 못 고치는 그런 병. 전생에 자취방 계약할 때 집주인이 "곰팡이는 원래 그런 거예요"라고 했던 순간의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다. 그 결과가 뭐냐면, 나는 마을에서 완전히 웃음거리다. "도현이 저 자식, 남자 체면을 아주 팔아먹는다니까." 최준서가 마을 어귀에서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최준서는 하안촌 남자아이들 중 제일 콧대 높은 놈이다. 키도 크고 얼굴도 반반해서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은데, 성격이 딱 인기 많은 놈 특유의 재수 없는 스타일이다. "우리는 이렇게 앉아서 대접만 받으면 되는데 쟤는 왜 저러고 사냐?" 옆에 있던 다른 남자애가 낄낄거렸다. "몰라, 저 새끼 어디 아픈 거 아니냐?" "아니면 뭐, 여자들한테 잘 보이려고 저러는 거 아니냐? 이 동네에선 안 먹히는 전략인데." 최준서가 팔짱을 끼고 덧붙였다. 그 말에 옆 애들이 또 낄낄거렸다. 그럴 리가. 나 안 아프거든. 여자들한테 잘 보이려는 전략이라니, 그런 계산 자체를 안 하고 산다고. 오히려 너네가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밥상 앞에서 입만 벌리고 있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고 츳코미를 날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 세계에서 그런 소리 했다간 진짜 미친놈 취급받는다. 가뜩이나 걸레질 좋아하는 놈이라고 소문났는데, 거기다 "너네가 이상한 거야"까지 얹으면 마을 회의에 안건으로 올라갈지도 모른다. 안건명: 이도현 정신머리 점검의 건. 엄마, 김서영은 남편 없이 나 하나만 보고 사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그래서 엄마는 나를 애지중지 키웠는데, 문제는 그 애지중지가 이 세계 기준으로는 '아들을 온실 속 화초처럼 키운다'는 뜻이라는 거다. 근데 나는 그 온실을 스스로 뛰쳐나와서 걸레질을 하고 있으니 엄마 입장에서도 속이 터질 노릇이었을 거다. 엄마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미 소문이 파다한 모양이었다. "서영이네 아들은 대체 왜 그런다니, 참 특이하다니까." 근데 정작 엄마는 그 소문에 크게 반응을 안 했다. 그냥 나를 좀 신기하게 볼 뿐이었다. "도현아." 밭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가 나를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손에는 흙 묻은 호미가 들려 있고,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오늘도 그러고 있었니." "어머니, 저녁은 제가 할게요. 오늘 시장에서 좋은 나물 구했거든요." "...너 진짜 내 아들 맞아?" 농담 반 진담 반의 물음에 나는 그냥 웃었다. "어머니 배 아파서 낳으셨잖아요." "그건 그런데, 배 아파서 낳은 아들이 걸레를 이렇게 잘 짤 줄은 몰랐지." 엄마가 피식 웃으며 마루에 걸터앉았다. "옆집 미영이 엄마가 그러던데, 너 요즘 아예 마을 명물 됐다더라. '하안촌 걸레왕자' 라나 뭐라나." "...그런 별명 누가 지었어요?" "몰라, 애들 사이에서 도는 모양이던데." 아, 이건 좀 충격이다. 전생에서도 별명 복 없었는데 여기서도 그러네. 엄마는 나를 이해 못 하지만, 그래도 말리지는 않는다. 다른 집이었으면 벌써 무당이라도 불렀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 치고는 꽤 쿨한 편이라,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뒀다. "근데 도현아, 진짜 궁금한데." 엄마가 부엌으로 들어가는 나를 따라오며 물었다. "넌 왜 그렇게 사는 게 좋아? 남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사는데." 잠깐 말문이 막혔다. '전생에 자취 9년 차라 그래요'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제 손으로 뭔가 해놓으면 마음이 편해요." "참 별종이다, 별종이야." 엄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녁을 차리다가 문득 [가정부] 계열 스킬창을 열어봤다. 이 세계에 떨어진 뒤로 알게 된 사실인데, 나는 남들과 달리 '스킬창'이라는 게 보인다. 마력을 쓰는 스킬이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생활 능력치 스킬 말이다. [스킬: 빨래의 정석 Lv.7] [스킬: 반찬의 정석 Lv.9] [스킬: 정리정돈의 화신 Lv.6] [스킬: 응급처치의 기초 Lv.3] [스킬: 나물 무침의 비기 Lv.4 (NEW)] 나물 무침 스킬은 또 언제 생긴 건지 모르겠다. 아까 시장에서 나물 다듬을 때 생긴 건가. 레벨은 계속 오르는데 이게 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지 모르겠다. 검술 스킬이나 마법 스킬이 있으면 또 모를까. 누가 나한테 "너 그 스킬로 뭐 할 건데?"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제 밥상은 제가 챙깁니다' 정도? 자랑스러운 건 맞는데 어디 가서 자랑할 데가 없다는 게 함정이다. [청연경 3장 2절, 여신은 손끝에서 태어난 것을 사랑하시니 그 정성이 헛되지 아니하리라] 마을 신전 벽에 붙어있는 경전 구절이다. 헛되지 않다는데, 지금까지 내 정성은 그냥 놀림거리로만 쓰이고 있으니 여신님이 좀 구라를 치신 것 같다. 아니면 여신님 기준의 '헛되지 않음'과 내 기준의 '헛되지 않음'이 좀 다른 건지도. 신들은 원래 시간 단위가 다르다니까, 뭐 백 년쯤 지나면 이 스킬들이 빛을 발할지도 모르지.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어야 얘긴데. 저녁상을 다 차리고 엄마와 마주 앉았다. 나물 무침에 젓가락이 자꾸 갔다. "이거 진짜 맛있다, 도현아." "레벨업 했거든요." "...무슨 소리야 그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엄마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나물을 한 젓가락 더 집었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뿌듯했다. 숙련도가 밥상 위에서 이렇게 티가 날 줄이야. 밤이 깊어지자 마당에 나가 하늘을 봤다. 설거지를 마치고 손에 남은 물기를 앞치마에 닦으며 나온 참이었다. 원래 이맘때 청연국 하늘은 맑고 별이 잘 보이는 게 정상이다. 평소 같으면 은하수까지 보일 정도로 청명한 밤하늘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서쪽 하늘 한구석이 이상하게 시커멓다. 구름도 아니고, 그냥 하늘에 잉크를 쏟아부은 것처럼 뭉텅이로 검었다. 별빛이 그 근처에서만 유독 흐릿하게 죽어 있는 게, 마치 그 부분만 다른 화질로 렌더링된 것 같았다. 뭐지?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착시인가 싶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봤는데도 여전했다. 마을 개들이 갑자기 일제히 짖기 시작했다. 왈왈왈왈! 그것도 그냥 짖는 게 아니라 낑낑거리면서 뒷걸음질 치는 소리였다. 옆집 개 검둥이는 아예 마당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낑낑댔다. 동물들이 저럴 땐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거, 전생 예능 프로그램에서 몇 번 본 기억이 있다. 지진 나기 전 동물들이 이상행동 보인다는 그거. 설마 이 세계에도 지진이 있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설마,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그 불안을 고개 저어 털어버렸다. 에이, 설마. 내일도 그냥 걸레 빨고 밥 짓는 평화로운 하루겠지. 내가 무슨 세계의 운명을 짊어진 주인공도 아니고, 그냥 촌구석 걸레왕자인데 뭔 일이 있겠어. 스스로를 그렇게 다독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나는 그렇게 믿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하늘 저편의 그 시커먼 얼룩은, 내가 잠든 사이에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더 넓어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검은 물감을 하늘 캔버스 위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번지게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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