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서은하의 검이 그린 궤적은 마치 하얀 초승달 같았다.
촤아아악!
검광이 물기둥을 두 갈래로 갈랐고, 그 여파로 물살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마을을 덮치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괴물의 마지막 머리도 그 일격에 목이 잘려나갔다.
쿠웅.
거대한 몸통이 땅에 쓰러지는 소리가 마을 전체를 울렸다.
정적이 흘렀다.
다들 숨죽인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나도 부상자들 위에 엎드린 채로, 슬쩍 고개만 들어 상황을 확인했다.
괴물의 사체는 검은 안개로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저게 원래 저렇게 깔끔하게 사라지는 건가.
전생이었으면 저 정도 크기의 사체 처리하려면 굴착기에 트럭 몇 대는 불렀어야 할 텐데.
판타지 세계는 쓰레기 분리수거 문제 하나는 편하게 해결해주는구나.
[청연경 7장 4절, 재난이 지나간 자리엔 은혜가 남는다 하였으니]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은혜가 아니라 무너진 지붕 잔해 같은데요, 여신님.
저 처마 밑에 깔린 장독대도 은혜인가요?
주변을 둘러보니 상황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붕 절반이 날아간 집, 무너진 담벼락, 그 잔해 사이에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만 보는 노인.
그리고 내가 눕혀놓은 부상자들 여섯 명은 다들 숨은 붙어 있었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서은하가 검을 거두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의 눈빛이 뭔가 미묘했다.
저벅, 저벅.
갑옷 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너."
"네?"
"방금 그 대응, 훈련받은 건가?"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훈련은 무슨, 그냥 전생 기억에 남아있던 재난 대피 매뉴얼이 몸에 밴 것뿐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겹도록 봤던 그 훈련 영상, 방독면 쓰고 책상 밑으로 들어가던 그 훈련.
설마 그게 이세계에서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인생 뭐 하나 버릴 게 없다더니, 이건 좀 억울하다.
그때 열심히 안 했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물쭈물하다 다 죽었을 텐데.
하지만 그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저는 사실 전생에 지구인이었고 거기서 재난 대피 훈련을 좀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면 저 검이 이번엔 내 목을 향할 게 뻔했다.
"그, 그냥... 집안일 하면서 익힌 거예요."
서은하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집안일...로 저 정도 대응이 가능하다고?"
그녀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마치 거짓말 탐지기라도 되는 양 나를 훑어보는 시선이었다.
아니, 진짜인데.
저희 집 청소하고 밥 하고 빨래하다 보면 순발력이 좀 늘긴 하거든요.
뒤에서 다른 기사 한 명이 끼어들었다.
투구를 벗은 그의 얼굴엔 아직도 놀란 기색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단장님, 부상자 응급처치 상태를 보니 거의 완벽한 트리아지입니다. 게다가 지혈, 고정, 이송 순서까지... 이건 전문 교육을 받지 않으면 나오기 힘든 수준인데요."
트리아지가 뭔지도 모르는 나로서는 그냥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냥 유튜브에서 본 응급처치 영상 몇 개 기억나는 대로 따라 한 거였는데, 이게 전문 용어까지 붙을 일인가.
괜히 뿌듯하면서도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 최준서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섰다.
얼굴엔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고, 팔에 감아놓은 붕대 사이로 핏자국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저 자식 원래 좀 이상했어요. 매일 청소하고 밥하고... 근데 오늘 보니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를 힐끔 봤다.
그 눈빛에 뭔가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평소 나를 무시하던 그 눈빛이 아니었다.
"...쓸모없는 건 아니었네."
최준서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저 자식, 평소엔 나만 보면 걸레짝 취급하더니.
눈가가 살짝 촉촉해졌다.
농담이다.
그냥 먼지가 좀 들어간 거다.
방금 물기둥 터진 거 못 봤나, 사방에 물방울이 안개처럼 떠다니는데 안 들어갈 리가 없잖아.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상황을 파악하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아이가... 우리를 살렸다고?"
"세상에, 도현이가?"
"아니 저 얼빠진 표정으로 맨날 빨래나 널던 애가?"
평소 나를 웃음거리 취급하던 아주머니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 이상한 애' 취급이었는데, 오늘은 '저 대단한 애'가 되어있었다.
심지어 저 앞집 김씨 아주머니, 나만 보면 혀를 끌끌 차던 그분마저 지금은 두 손을 모으고 나를 보고 있었다.
인간이란 참 간사하다.
뭐, 나쁘진 않지만.
서은하가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이번엔 아까와는 다른, 조금 더 진지한 눈빛이었다.
"이름이 뭐지?"
"이도현이요."
"이도현."
그녀는 내 이름을 한 번 되뇌었다.
마치 잊지 않겠다는 듯이.
발음이 살짝 어색했지만, 그마저도 나쁘지 않았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나는 청연국 왕도 청연성 소속 기사단장, 서은하다."
기사단장.
아까 다른 기사가 '단장님'이라고 부른 게 그냥 예의상 존칭이 아니었다.
진짜 기사단장이었다니.
그럼 손님이 아니라 국가 공무원이었던 거잖아.
귀족 아가씨인 줄 알고 다과상 차려드린 나 자신이 순간 부끄러워졌다.
심지어 그때 나 "손님, 차 좀 더 드릴까요?" 하면서 알랑거리기까지 했는데.
공무원한테 그렇게 굽신거릴 필요는 없었잖아.
"...죄송해요, 그냥 귀한 손님인 줄 알고..."
"아니, 오히려 고맙게 생각한다."
서은하가 담담하게 말했다.
"덕분에 우리도 마을 사람들의 위치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고, 부상자 대응도 신속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사상자가 더 나왔을 거다."
그녀의 목소리엔 진심이 묻어 있었다.
기사단장이라는 사람이 일개 촌부에게 이렇게까지 예를 갖춰 말할 줄이야.
칭찬을 정면으로 받으니 어색해서 몸이 배배 꼬였다.
전생에서도 이런 칭찬은 별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직장 상사한테 들었던 말이라곤 "이도현 씨, 이번 달도 실적이 좀..." 뿐이었는데.
"그런데,"
서은하가 말을 이었다.
"네 안에 있는 그 힘, 정확히 뭔지 궁금하군. 마력 반응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데도 그 정도 능력을 발휘하다니."
마력 반응이 거의 없다는 말이 유독 귓가에 걸렸다.
하지만 그 말의 무게를 제대로 이해하기엔, 나는 아직 이 세계의 마력 체계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다.
마력이 없는데 뭘 어떻게 했다는 거지?
그냥 몸이 알아서 움직인 건데.
"그냥... 스킬 같은 거예요. 가정부 스킬 계열이라고 해야 하나."
서은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가정부 스킬... 그런 계열은 들어본 적이 없군."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마치 뭔가를 재는 저울추 같았다.
"이도현, 하나 묻겠다."
"네?"
"기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 해본 적 있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눈을 껌뻑였다.
기사?
내가?
마을에서 걸레질이나 하던 놈이?
주변이 순간 조용해졌다.
심지어 부상자 몇 명도 붕대를 감은 채로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봤다.
다들 내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 순간, 이상하게도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전생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두근거림이었다.
회사에서 승진 발표 기다릴 때랑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요."
"그럼 지금부터 생각해봐라."
서은하가 말했다.
"오늘 네가 보여준 능력은, 단순한 재능이 아니다. 그건 이 세계에서 아주 귀한 자질이야."
엄마가 어느새 다가와 내 옆에 서 있었다.
치마 자락엔 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손엔 아직도 붕대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아까까지 나랑 같이 부상자들 돌보느라 정신없던 그 손이었다.
엄마의 표정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혀있었다.
자랑스러움과 불안함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단장님, 제 아들이... 정말 기사단에 들어갈 자격이 있나요?"
엄마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평소엔 흔들림 없던 그 목소리가.
"확답은 못 드리지만,"
서은하가 말했다.
"적어도 시험받을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기사단이라니..."
"남자애가 기사단에?"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수군거림이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다들 놀란 눈치였지만, 그 눈빛엔 이전과 다른 뭔가가 섞여 있었다.
경외감이랄까, 아니면 그냥 신기함이랄까.
남자가 기사단에 들어가는 건 이 세계에서 극히 드문 일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그 순간엔 그저 서은하의 말 한마디가 내 가슴속 깊은 곳을 두드리고 있었다는 것만 확실했다.
엄마는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가 원한다면요."
그 말속엔 걱정과 응원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엄마는 늘 이랬다.
겉으론 담담한 척하면서도 속으론 온갖 걱정을 다 하는.
나는 무너진 마을을 둘러봤다.
지붕이 날아간 집들, 흩어진 세간살이, 그리고 그 사이에서도 서로를 부축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그저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을 지킨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오늘 처음으로 알았다.
전생에선 남 눈치 보며 살기 바빴는데, 여기선 뭔가 다른 이유로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해보고 싶어요."
내 대답에 서은하가 살짝 미소 지었다.
처음 보는 그녀의 웃음이었다.
평소의 그 날카롭던 눈빛이 살짝 풀어지면서, 뭔가 인간적인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좋다. 그럼 내일 왕도 청연성으로 함께 가자."
그 말과 동시에 마을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
누군가는 휘파람까지 불었다.
얼떨결에 나는 마을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이 결정이 얼마나 큰 폭탄을 안고 있는지.
왕도로 가는 그 길 위에서, 내가 마주하게 될 진실이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