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동시접속자 0명의 여왕

1화

강도윤은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두시 십일분이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마감이 여섯 시간 남은 경영전략론 레포트가 반쯔 채워진 채로 떠 있었다. 커서가 문장 중간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그 문장은 세 시간째 완성되지 않고 있었다. 커피는 이미 식었다. 종이컵 바닥에 갈색 얼룩이 말라붙어 있었다. 도윤은 컵을 들어 흔들어보았다. 바닥에 남은 커피 찌꺼기가 얇은 막처럼 컵 벽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컵을 다시 내려놓았다. 책상 위에는 형광펜 세 자루, 다 쓴 볼펜 한 자루, 그리고 뜯지 않은 초콜릿바 하나가 흩어져 있었다. 초콜릿바는 어제 편의점에서 산 것이었다. 먹을 시간이 없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창밖에서 가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마저도 점점 뜸해지고 있었다. 새벽이 깊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윤은 목을 좌우로 꺾었다. 뻐근한 소리가 났다. 어깨를 두어 번 돌리고 나서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참고문헌을 찾으려 검색창에 논문 제목을 넣었다. 로딩이 평소보다 길게 이어졌다. 인터넷이 느려진 걸까, 생각하며 그는 마우스를 몇 번 클릭했다. 결과 목록이 떠올랐다. 익숙한 학술 데이터베이스 링크들 사이에, 낯선 링크가 하나 끼어 있었다. 주소는 알아볼 수 없는 문자로 뒤섞여 있었다. 한글도 아니었고 영어도 아니었다. 숫자와 기호가 이상한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도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링크를 들여다보았다. 호기심보다는 짜증이 먼저 났다. 안 그래도 시간이 없는데, 검색 결과에 이상한 게 끼어들다니. 바이러스 링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클릭 한 번으로 잘못된 사이트를 닫아버릴 생각이었다. 마우스를 움직여 링크 위에 커서를 올렸다. 그리고 눌렀다. 화면이 검게 변했다. 도윤은 눈을 깜빡였다. 프로그램이 다운된 줄 알았다. 전원 버튼에 손을 뻗으려던 순간, 화면 안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그리고 곧, 방이 나타났다. 돌벽이었다. 회색과 옅은 갈색이 섞인 돌이 촘촘히 쌓여 만들어진 벽이었다. 창문 대신 좁은 틈으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빛은 노란빛이 아니라 조금 더 붉은 기운이 섞인 빛이었다. 촛불 냄새가 나는 듯했다. 심지가 타는 냄새, 밀랍이 녹는 냄새. 화면 너머에서 냄새가 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도윤은 코를 문질렀다. 방송 제목은 없었다. 채널명도 없었다. 구독자 수도, 좋아요 버튼도, 어떤 표시도 없었다. 동시접속자 수를 알리는 숫자만 화면 구석에 조용히 떠 있었다. 0.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도윤은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장난 방송인가. 아니면 해킹인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어느 쪽이든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는 마우스를 움직여 창을 닫으려 했다. 그때 화면 안에서 누군가 고개를 들었다. 도윤의 손이 마우스 위에서 멈췄다. 은백색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빛을 받을 때마다 은은하게 반짝였다. 눈동자는 투명한 청색이었다. 소녀였다. 나이는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눈빛만은 또렷했다. 아이의 눈빛이라기보다는, 오래 생각을 해온 사람의 눈빛이었다. 소녀가 화면 이쪽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들리시나요."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도윤은 손을 멈췄다. 장난 방송이라 생각했다. 누군가 몰래카메라를 준비했거나, 이상한 컨셉 방송을 하는 거라고. 하지만 소녀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제 목소리, 들리시는지요." 다시 물었다. 같은 문장이었지만, 억양이 조금 더 다급해져 있었다. 도윤은 잠시 고민했다. 답을 하면 무언가 시작될 것 같았다. 답을 하지 않으면 창을 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결국 채팅창을 클릭했다. 닉네임이 자동으로 부여되어 있었다. 야행성. 그는 짧게 적었다. 들립니다. 전송 버튼을 눌렀다. 손끝이 키보드 위에서 잠시 떠 있었다. 소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말로, 놀란 눈이었다. 그러곤 곧 밝아졌다. 화면 아래 채팅창에 그의 글자가 떠오르자, 소녀는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여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소리 내어 읽었다. "들립니다, 라고 하셨군요."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도윤은 저도 모르게 마우스를 놓았다. 대답이 이렇게 즉각적으로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채팅 봇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낯선 존재였다. 소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드디어 누군가 응답해 주셨습니다." 안도가 섞인 목소리였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화면에 비쳤다. 소녀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겹쳐 올렸다. 떨림을 감추려는 것처럼 보였다. 소녀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등 뒤로 붉은 휘장이 늘어져 있었다. 휘장 끝자락이 살짝 해져 있었다. 의자는 낡았지만 값비싸 보이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등받이에 정교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꽃무늬였다. 오래된 것 특유의 색이 바랜 흔적도 함께였다. "저는 설란국의 여왕, 하은설이라 합니다." 도윤은 헛웃음을 삼켰다. 여왕이라니. 어떤 컨셉 방송인가 싶었다. 요즘은 별의별 방송이 다 있으니까. 하지만 화면 속 소녀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조금도 없었다. 눈빛은 오히려 더 진지해져 있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요." 은설이 조용히 말했다. 그 말투에는 이미 여러 번 이런 반응을 겪어본 사람의 여유가 섞여 있었다. "저도 이 방송이 누구에게 닿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매일 밤 이 자리에 앉아 말을 걸 뿐입니다." 도윤은 채팅창에 손을 올렸다. 질문이 여러 개 머릿속에서 부딪혔다. 누가 이런 걸 만들었는지, 어떤 목적인지, 자신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그중 가장 간단한 것을 골라 적었다. 무슨 방송입니까. "국정을 돌보는 일입니다." 은설이 답했다.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석 달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날로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무게가 있었다. 도윤은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장난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누구도 이런 걸 이렇게 담담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연기라면, 연기치고는 지나치게 무거웠다. "신하들은 제게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저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은설이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조금씩 낮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매일 이 방을 열어둡니다. 누군가 지나가다 제 말을 들어주기를 바라며." 도윤은 화면 속 소녀의 눈을 오래 바라보았다. 장난이라면 지나치게 정교했다. 연출이라면 소품이 지나치게 낡아 보였다. 촛불이 흔들리는 각도, 벽의 습기 자국, 소녀의 손톱 밑에 남은 잉크 얼룩까지. 모든 게 지나치게 사실적이었다. 카메라 렌즈로 찍었다면 저런 그림자가 저렇게 자연스럽게 지지 않는다. 도윤은 영상 편집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수업에서 배운 것과 지금 화면 속 장면은 어딘가 결이 달랐다. 설명할 수 없는 차이였지만, 분명히 있었다. "오늘은," 은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성들의 세금을 낮추라는 신하와, 올려야 한다는 신하가 다투고 있습니다. 저는 어느 쪽이 옳은지 모릅니다." 도윤은 손가락을 채팅창 위에 올렸다. 경영전략론 강의에서 들었던 재정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쳤다. 재정 건전성, 세율 곡선, 단기 대응과 장기 대응. 교수가 칠판에 그려준 그래프가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이건 그런 수업 얘기가 아니었다. 화면 속 소녀는 진짜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윤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뭐라고 적어야 할지, 이게 정말 현실의 국정에 영향을 미칠 일인지, 아니면 그냥 대화의 흐름을 맞춰주는 것뿐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답을 적기도 전에, 화면이 흔들렸다. 지지직, 하는 잡음이 스피커에서 새어나왔다. 촛불이 세차게 일렁였다. 화면 속 그림자들이 순간적으로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줄어들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나무문이 돌바닥을 스치며 열리는 소리였다. 은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방금까지 있던 부드러움이 완전히 걷혔다. 남은 것은 긴장뿐이었다. "누가 오고 있습니다." 낮은 목소리였다. 다급함이 배어 있었다. 은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살짝 밀리며 나무 바닥을 긁는 소리를 냈다. 휘장이 흔들렸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화면이 흔들리며 지지직거렸다. 소녀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두 겹으로 겹쳐 보였다.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면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왜 이렇게 다급한지, 왜 자신이 이렇게 초조해지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기다리세요, 라고 적었지만 전송이 되지 않았다. 전송 버튼을 몇 번이고 눌렀다. 클릭할 때마다 화면이 한 번씩 더 지지직거렸다. 버튼은 반응하지 않았다. 글자는 채팅창 안에 그대로 남은 채, 전송되지 못하고 있었다. 화면이 완전히 검게 변했다. 동시접속자 0. 숫자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도윤은 몇 번이고 새로고침을 눌렀다. 브라우저를 껐다가 다시 켰다. 검색 기록을 열어 아까 클릭했던 그 링크를 찾으려 했다. 같은 페이지는 다시 열리지 않았다. 검색 기록을 다시 확인해도 그 링크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방문 기록 목록에는 원래 찾으려던 논문 검색 결과만 남아 있었다. 마치 그 링크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도윤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본 것이 정말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새벽 내내 레포트에 시달린 뇌가 만들어낸 환각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손끝에는 여전히 그 감각이 남아 있었다. 차가운 감각. 분명히 실재했다는 감각. 창밖으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와 방 안의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절반쯤 남은 레포트가 그대로 떠 있었다. 커서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도윤은 그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레포트를 마쳐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감까지 남은 시간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화면 속 소녀의 얼굴만 남아 있었다. 은백색 머리카락, 투명한 청색 눈동자, 그리고 마지막 순간의 그 표정. 방금 본 것이 사실이라면, 그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 누구인지, 소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녀가 다시 이 화면 앞에 앉을 수 있을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도윤은 다시 검색창을 열었다. 같은 논문 제목을 입력했다. 결과는 아까와 똑같았다. 그 낯선 링크는 없었다. 그는 몇 번이고 페이지를 새로고침했다. 새벽빛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링크는 나타나지 않았다.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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