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너 요즘 밤마다 뭐 해."
박준혁이 도윤의 어깨를 툭 쳤다.
강의실 뒷자리였다.
교수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흐릿하게 들렸다.
칠판에 적힌 수식은 도윤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좀."
도윤은 얼버무렸다.
"좀이 아니지. 어제도 톡 씹었잖아. 그 전날도."
준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손끝이 책상을 두드렸다.
톡, 톡, 톡.
일정한 박자였다.
"여자 생겼냐."
도윤은 순간 말을 멈췄다.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준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사냥감을 발견한 사람의 눈빛이었다.
"뭐야, 진짜야?"
"그런 거 아니야."
"근데 왜 그 표정이야."
"표정이 뭐."
"방금 딱 걸린 표정이었어."
도윤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어제 밤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하면 믿을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촛불이 흔들리는 방.
낡은 의자에 앉은 여자.
왕과 여왕이라는 말.
어느 것부터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준혁은 집요했다.
원래 그런 성격이었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오늘 나 너희 집 간다."
"뭐?"
"과제도 도와줘야 하고, 겸사겸사 니가 뭘 보는지도 봐야겠다."
"과제는 무슨 과제."
"몰라, 아무튼 갈 거야."
준혁의 목소리에는 이미 결정이 끝난 사람의 여유가 있었다.
도윤은 더 반박하지 않았다.
어차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준혁은 정말로 도윤의 방에 나타났다.
캔맥주 두 개를 흔들며 문을 밀고 들어왔다.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다.
방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발로 슬쩍 밀어냈다.
"자, 이제 보여줘 봐."
"뭘."
"그 여자 생겼다는 거."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럼 뭐데."
도윤은 잠시 고민했다.
말리고 싶었지만, 준혁의 눈빛은 이미 결심이 서 있었다.
캔맥주를 책상 위에 쿵 소리 나게 내려놓는 손짓에서도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노트북을 열었다.
전원을 켜는 손끝이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계는 열한 시 오십육 분을 가리켰다.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조금만 기다려봐."
"뭘 기다려. 야동이야?"
"아니라고."
화면이 검게 물들었다.
익숙한 어둠이었다.
도윤은 그 몇 초의 정적을 이미 알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화면을 바라봤다.
준혁은 아직 모르는 얼굴로 캔을 홀짝였다.
같은 방이 나타났다.
촛불, 붉은 휘장, 낡은 의자.
은설이 앉아 있었다.
동시접속자는 5로 늘어 있었다.
준혁이 캔을 든 채로 그대로 멈췄다.
캔의 입구가 그의 입술에 닿아 있었지만 마시지는 못했다.
"이게, 뭐야."
"방송이야."
"이거 CG야? 무슨 게임이야?"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다는 게 말이 되냐. 니 노트북이잖아."
"나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어."
은설이 화면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가 정확히 두 사람이 앉은 방향을 향했다.
"오늘은 두 분이시군요."
준혁의 손에서 캔이 미끄러졌다.
다행히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도윤이 잡아챘다.
맥주가 조금 흘러 손등을 적셨다.
차가운 감각이 도윤의 팔뚝을 타고 흘렀다.
"저기, 저기 방금 우리 본 거야?"
준혁이 소리 낮춰 물었다.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그런 것 같은데."
도윤이 채팅창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잠시 멈췄다.
제 친구입니다. 처음 뵙습니다.
"강도윤 님의 친구분이시군요."
은설이 미소 지었다.
"저는 하은설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준혁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화면을 훑었다.
촛불의 그림자, 휘장의 자락, 의자의 나무 무늬까지.
하나하나 확인하듯 눈으로 더듬었다.
그러다 겨우 입을 열었다.
"야, 이거 실제 방송 아니야? 무슨 스트리머 알바생 시켜서 컨셉 잡은 거 아니냐."
"동시접속자 봐. 0이었어. 처음엔."
"그게 더 이상하잖아."
준혁이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코끝이 거의 모니터에 닿을 지경이었다.
은설의 표정, 눈동자의 흔들림, 방 안의 그림자까지 하나하나 살폈다.
"이거, CG라면 진짜 잘 만든 거고. 실제라면..."
말을 잇지 못했다.
준혁의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는 그것을 손등으로 슬쩍 닦았다.
그때 은설이 손에 든 두루마리를 펼쳤다.
낡은 종이였다.
귀퉁이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접힌 자국마다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오늘은 이것을 여쭙고 싶었습니다."
은설이 두루마리를 화면 쪽으로 향했다.
글씨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알아볼 수 없는 문자였다.
붓끝으로 눌러 쓴 듯한 획들이 종이 위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하지만 하단에 낯익은 표식이 찍혀 있었다.
원 안에 세 개의 선이 겹쳐진 문양.
도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은설의 방에서 몇 번인가 스쳐 지나갔던 문양이었다.
"이 문양, 뭡니까."
채팅창에 물었다.
"이것은 선왕의 봉인 문양입니다."
은설이 답했다.
"하지만 이 문서는 최근에 작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봉인이 있는데도 날짜가 이상합니다."
준혁이 도윤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저거 위조 문서 같은데."
"뭐?"
"봉인이 진짜인데 날짜가 안 맞으면, 누가 예전 도장을 다시 쓴 거잖아. 그거 완전 문서 위조 클리셰야."
"너 그런 건 또 어떻게 알아."
"드라마에서 백 번은 봤지."
도윤은 잠시 준혁을 바라보다 채팅창에 손을 올렸다.
손끝이 키보드 위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움직였다.
봉인 문양이 진짜라면, 그 도장을 가진 자가 최근에 문서를 새로 만든 겁니다. 누가 그 도장에 접근할 수 있는지부터 확인해 보십시오.
은설의 얼굴이 굳었다.
촛불빛이 그녀의 표정을 더 짙게 만들었다.
"봉인은... 선왕의 것입니다. 지금은 제가 보관하고 있어야 합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화면 속 은설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은설이 손을 뻗어 서랍을 열었다.
안을 확인하던 손이 멈췄다.
몇 번이고 서랍 안을 뒤적이는 손짓이 반복됐다.
"없습니다."
낮은 목소리였다.
"봉인이 없습니다."
준혁과 도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 도장을 훔쳐 문서를 위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서에는 여왕의 이름이, 여왕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새겨지고 있었다.
"야, 이거 진짜 심각한 거잖아."
준혁이 낮게 중얼거렸다.
"조용히 해."
"아니, 저거 나라 문서 위조 사건이잖아. 왕조 시대에 이런 거 걸리면 목이 날아가는 거 아니야?"
"모르겠으니까 조용히 좀."
"이 문서가 어디서 나온 겁니까."
도윤이 다급히 물었다.
"재무를 담당하는 대신이 가져왔습니다. 새로운 지출 승인서라고 했습니다."
은설의 손이 두루마리를 다시 말았다.
손끝이 종이의 결을 따라 미끄러졌다.
"그자가 최근 지출을 조사하라는 제 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도윤의 등줄기로 서늘한 감각이 지나갔다.
지출을 확인하라던 조언이 오히려 위조를 위한 명분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자신이 던진 조언이 도리어 함정의 실마리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하십시오."
채팅창에 그렇게 적었다.
"그자를 당장 신뢰하지 마십시오. 다른 경로로 지출 내역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은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기, 강도윤 님."
준혁이 도윤의 팔을 잡아끌었다.
"뭐."
"저 사람, 진짜 왕궁 사람이야? 아니면 그냥 배우야?"
"나도 몰라. 계속 보고 있으면 알게 될 것 같은데."
"이런 게 어딨어. 나 지금 진짜 심장 뛰거든."
준혁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의 손이 캔맥주를 다시 붙잡았지만 정작 마시지는 못했다.
그 순간, 방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여럿이었다.
쿵, 쿵, 쿵.
규칙적이지 않은, 다급한 걸음이었다.
은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오늘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화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촛불의 그림자가 벽 위에서 크게 일그러졌다.
준혁이 도윤의 팔을 붙잡았다.
"야, 저거 진짜 위험한 거 아니야?"
"몰라, 나도."
"야, 저 사람 지금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니냐?"
대답할 틈도 없이 화면이 완전히 꺼졌다.
동시접속자 5.
마지막 숫자가 그대로 화면에 남아 있었다.
검은 화면 위에 숫자만 덩그러니 떠 있었다.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울렸다.
준혁이 캔맥주를 내려놓았다.
손에서 놓은 캔이 책상 위에서 흔들리다 멈췄다.
"야, 도윤아."
"응."
"이거, 우리 조사해봐야 할 것 같은데."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우연이라 여겼던 것들이, 더 이상 우연으로 보이지 않았다.
문양, 위조된 문서, 사라진 봉인, 그리고 다급한 발소리.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별개의 사건 같았지만, 모아놓고 보면 어딘가에서 이미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준혁이 노트북 화면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검은 화면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거 다시 켜지긴 하는 거지?"
"몰라."
"모른다는 말 좀 그만해."
"나도 진짜 모른다고."
도윤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그는 화면을 다시 노려보았다.
방금 전까지 은설이 앉아 있던 자리, 촛불이 흔들리던 자리.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검은 유리판 위에 자신과 준혁의 얼굴만 흐릿하게 비칠 뿐이었다.
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였다.
좁은 방 안을 몇 걸음씩 오가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여자, 왕궁에 있는 거 맞지? 그러면 지금 저 발소리는 누구야."
"모르지."
"근위병일 수도 있고, 아니면..."
준혁이 말을 멈췄다.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도윤은 다시 노트북 화면을 켰다.
바탕화면이 나타났다.
평범한 파일들, 평범한 아이콘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였다.
하지만 방금 본 것은 분명 현실이었다.
아니, 적어도 도윤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내일 다시 켜볼 거야?"
준혁이 물었다.
"당연하지."
"나도 같이 볼래."
"매일 올 거야?"
"어. 이거 못 보고 넘어가면 나 잠도 못 잘 것 같아."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검은 화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동시접속자 5라는 숫자가 아직도 눈앞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다섯 명 중 하나는 분명 방문 밖의 발소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은설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방 안의 시계가 자정을 넘긴 시각을 가리켰다.
준혁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고, 도윤은 노트북을 닫지 못한 채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것도 뜨지 않는 검은 화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두 사람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