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무언가를 모른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처음 깨달았다. 유채원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아무 반응이 없던 나를 그녀는 몇 초간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이 놀라움인지 실망인지, 아니면 재미있어하는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서 나는 술잔을 쥔 손에 괜히 힘을 주고 말았다.
도대체 뭘까, 이 시선은.
내가 뭔가 큰 실수를 한 건가 싶은 생각까지 들 무렵, 그녀가 먼저 시선을 거두며 픽 웃었다. 그 짧은 웃음소리 하나에도 이상하게 안도감이 밀려와서, 나는 나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살짝 내쉬었다.
"저기, 뭔가 문제 있어요?" 내가 조심스레 묻자 그녀는 픽 웃으며 술잔을 다시 채웠다.
"아니요, 전혀. 오히려 신선해서."
신선하다는 말이 칭찬인지 아닌지 헷갈렸지만, 나는 굳이 캐묻지 않고 그저 잔을 받아 마셨다. 목 넘김이 유난히 쓰게 느껴졌던 건 술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그녀의 눈빛이 아직 신경 쓰였기 때문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술이 들어갈수록 그녀는 점점 더 말이 많아졌는데, 처음의 도도하고 여유로운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어딘가 사람 좋고 허술한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젓가락으로 전을 집으려다 놓치고, 그걸 보며 자기가 먼저 큭큭 웃고, 그러다 옆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등으로 대충 쓸어 넘기며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는 그 모습이 오히려 낯설고도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나는 나도 모르게 계속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람,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서늘하고 정제된 인상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술 몇 잔에 그렇게 쉽게 벽이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낙차가 지나치게 크다는 생각도 스쳐서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저 있잖아요, 강도윤 씨." 그녀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테이블 위 촛불이 그녀의 눈동자에 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진짜로 저 몰라요?"
"…네? 뭘요?"
"아 진짜, 순진한 건지 무심한 건지." 그녀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저 소나기 멤버였는데."
소나기.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하고 걸렸다. 몇 년 전인가, 회사 후배들이 노래방에서 부르던 노래, 티브이에서 스치듯 봤던 화려한 무대, 그런 파편적인 기억들이 순식간에 이어지며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선배, 이 노래 모르세요? 완전 국민 노래인데.'
언젠가 회식 자리에서 후배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했던 말이 문득 귓가에 스쳤다. 그때도 나는 그냥 웃어넘겼었는데, 이렇게 다시 그 이름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그 소나기요? 데뷔곡이 그… 첫사랑 어쩌고 하는…"
"어, 맞아요. 그거." 그녀가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배우 하고 있고요."
배우. 그 단어까지 듣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녀의 얼굴을 다시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새로 확인하듯 훑으면서, 어딘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던 게 착각이 아니었구나 싶으면서도, 정작 어느 작품에서 봤는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서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해요, 제가 티브이를 잘 안 봐서…"
"아니, 그게 왜 죄송할 일이에요."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근데 진짜 신기하네. 이 바닥 사람 중에 저 처음 보고 못 알아본 사람."
그 말에 담긴 뉘앙스가 묘하게 신경 쓰였다. 놀리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당황한 건지 구분이 안 갔는데, 그녀의 눈빛은 분명 조금 전과는 다른 온도를 띠고 있었다. 마치 익숙한 반응이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한 당혹감과, 동시에 그 낯섦을 즐기는 듯한 이중적인 표정이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술잔 테두리를 천천히 문지르며 나를 살피듯 바라봤다. 그 시선이 얼굴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나는 괜히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애꿎은 잔만 만지작거렸다.
이 사람은 지금 나를 재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신기해하는 걸까.
어색한 침묵이 잠깐 흘렀다.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 옆 테이블에서 터지는 웃음소리, 그 모든 것이 배경음처럼 멀어지는 사이 나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다음 말을 골랐는데, 결국 튀어나온 건 그다지 세련되지 못한 질문이었다.
"그럼 지금 여기 있는 거, 사람들이 알면 안 되는 거예요?"
그 질문에 그녀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방금까지 장난스럽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지면서, 그녀는 잔을 든 손을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딱, 하고 유리가 나무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뭐, 딱히 숨기는 건 아닌데." 그녀가 시선을 살짝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냥, 편하게 있고 싶어서요."
그 대답에서 뭔가 방어적인 벽이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허물어졌던 벽이 순식간에 다시 세워지는 걸 보면서, 나는 이 사람 안에 얼마나 많은 얼굴이 겹쳐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만도 하겠지.
낯선 사람 앞에서 함부로 방심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일 테니까. 나는 그 벽을 굳이 더 두드릴 생각은 없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는데, 그녀는 그런 내 태도가 의외였는지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피식 웃었다.
"진짜 특이하네, 강도윤 씨."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조금 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온기가 섞여 있었다. 마치 방금 세웠던 벽 사이로 아주 작은 틈이 다시 생긴 것 같은, 그런 온도였다.
나는 그 온기의 정체를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저 멀리서 하얀 드레스를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서연이 눈을 반짝이며 우리 테이블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걸 보고 말았다.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저 표정. 저 걸음걸이. 뭔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다가오는 서연을 보며, 나는 이 자리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어서, 애꿎은 술잔만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