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일단 밥부터 먹이겠습니다

4화

우편함 사건을 마음에 담아둔 채로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을 하고 퇴근을 했고, 저녁이면 서리가 만들어주는 밥을 먹었고, 밤이면 그녀가 돌아간 빈방을 바라보며 이상한 여운에 잠기곤 했는데, 그 사이 골목 어귀의 우편함은 여전히 반쯤 열린 채로 방치되어 있었고, 나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괜히 발걸음을 서두르곤 했다. 딱히 무언가를 확신한 것도 아니었으면서, 왜 자꾸 그쪽을 피하게 되는지는 나조차 설명할 수 없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저녁이었다.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과일 몇 개를 사고,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어딘가 낯선 기운이 감돌았다. 골목 특유의 습한 담벼락 냄새와 저녁밥 짓는 냄새가 뒤섞인 그 익숙한 공기 속에,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넥타이는 흠 하나 없이 매끈했고, 구두는 낮은 저녁 햇살을 받아 유난히 반짝거렸는데, 그 동네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좁은 골목의 담벼락과 낡은 대문들 사이에서 그 남자만 유독 이질적으로 도드라져 보였다. 그는 손에 사진 한 장을 든 채,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을 붙잡고 뭔가를 묻고 있었다. 나이 든 아주머니는 고개를 젓고 지나갔고,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학생 하나도 힐끗 보더니 관심 없다는 듯 스쳐 갔다. 나도 처음엔 그저 지나치려 했다. 낯선 사람과 마주치는 일이야 흔한 것이고, 굳이 얽힐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걸음을 옮기는 그 짧은 순간, 사진 속 얼굴이 스치듯 눈에 들어왔고, 나는 나도 모르게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우뚝. 낯설지 않았다. 아니, 낯설지 않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저기, 학생. 혹시 이 사람 본 적 있나요?" 남자가 나를 붙잡고 물었을 때, 나는 사진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사진 속 얼굴은 서리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눈매도, 콧대의 각도도, 심지어 살짝 처진 입꼬리까지도. 다만 사진 속 여자는 지금의 서리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뺨에는 옅은 홍조가 돌았고 눈빛에는 생기가 가득했으며,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어딘가의 행사장 같은 곳에서 조명을 받으며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의 서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사진과 서리의 얼굴을 번갈아 떠올리는 사이, 머릿속에서는 온갖 물음이 뒤엉켰다. 왜 이 사람이 서리를 찾고 있을까. 이 남자는 누구고, 저 사진은 언제 찍힌 걸까. "...아니요, 모르겠는데요." 나는 반사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입에서 말이 튀어나가는 순간까지도 나는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냥 몸이 먼저 반응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렇게 하기로 정해져 있던 것처럼,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갔다. 남자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잠깐 훑어보았다. 위아래로, 얼굴에서 옷차림까지, 마치 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지 가늠하려는 듯한 눈길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버텼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남자에게 들릴까 봐 조바심이 났다. 그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결국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혹시 보시면 이 번호로 연락 좀 주세요.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명함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회사 이름도, 부서명도, 직함도 없이 그냥 전화번호 하나만 인쇄된 그 작은 종이 조각이 나에게는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명함을 받아 주머니에 넣으면서도 남자의 얼굴을 다시 한번 힐끗 살폈는데, 그는 이미 다음 사람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몇 번이나 명함을 꺼내 보았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서리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며칠 전 우편함 사건도 아직 마음에 담아둔 채였는데, 이번 일까지 더해지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날 저녁 밥상에서도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서리가 끓여준 된장국에서는 구수한 냄새가 올라왔고, 밥그릇에서는 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는데, 나는 그 앞에서 숟가락을 든 채로도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결국 나는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식탁 위에 슬쩍 올려놓았다. 서리는 국을 뜨던 숟가락을 멈추었다. 시선이 명함 위에 고정된 채로, 그녀는 한참 동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탁ㅡ 숟가락이 식탁에 놓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 소리에 나까지 어깨를 움찔했을 정도였다. 서리의 손끝이 아주 살짝 떨리는 걸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어디서 났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정하던 억양은 사라지고 없었다. "골목에서 어떤 남자가... 이 사진을 들고 물어보더라고요." 나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 속 여자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서리 씨하고 많이 닮았던데." 서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명함을 손에 쥐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그것을 반으로, 다시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지만, 나는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숨소리도 평소보다 조금 얕아진 것 같았다. "그 사람들, 도윤 씨한테 또 오면..." 서리가 말을 하다 멈추었다. 잠깐의 정적 속에서 나는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았다. "그냥 모른다고 하세요. 부탁이에요." "누군데요, 그 사람들."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미 늦은 걸 알면서도, 궁금함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서리 씨, 혹시 누구한테 쫓기고 있는 거예요?" 서리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바닥에 살짝 끌리는 소리가 났고, 나는 그녀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균형을 잃은 서리가 살짝 휘청였고,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가 그대로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서리와 나의 몸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녀의 이마가 내 어깨에 닿았다. 나는 숨을 멈춘 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서리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는 감각이 이상하게 선명해서, 나는 그녀를 감싸 안았던 손을 얼른 떼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잠깐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어깨는 생각보다 가늘었고, 옷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은 미묘하게 서늘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짧은 순간이 길게 늘어졌다. "...미안해요." 서리가 먼저 몸을 떼며 낮게 말했다. 그녀의 얼굴이 평소보다 조금 붉어진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게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아니, 저기, 서리 씨." 나는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서리는 이미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걸음걸이는 평소보다 빨랐고, 어딘가 도망치는 사람의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늘은 그만 가볼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었는데, 문 밖으로 나가기 직전 잠깐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는 처음 보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경계와 두려움, 그리고... 아주 조금의 미안함 같은 것. "고마워요. 여러 번."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 삑ㅡ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닫힌 문을 한참 바라보며 방금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명함, 사진 속 낯선 여자, 그리고 서리의 떨리던 손끝. 이마가 내 어깨에 닿았던 순간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나는 괜히 그 자리에 서서 옷깃을 매만졌다. 뭔가 큰 것이 그녀의 조용한 일상 아래에 웅크리고 있다는 확신이 점점 짙어졌지만, 나는 아직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서리는 이제 그 어떤 것보다도 나에게 궁금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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