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다음 날 강의실 앞에서 나를 부른 건 박태현이었다. 체육특기생인 그는 큰 키와 넓은 어깨로 어딜 가든 시선을 끌었고, 성격도 그 외모만큼 시원시원해서 처음 만났을 때는 나쁘지 않은 인상이었다. 운동장에서 뛰다가도 나를 보면 손을 흔들고, 강의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어깨를 툭 치며 인사를 건네는 식이었다. 그런 스스럼없는 태도가 처음에는 고맙기도 했다. 낯선 학교,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먼저 다가와준다는 건 생각보다 큰 위안이었으니까.
다만 문제는, 그가 나를 친구라고 부르면서도 은근히 부려먹는 데 익숙하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심부름이었다. 프린트물 좀 가져다줘, 자리 좀 맡아줘, 그런 것들. 그러다 점점 범위가 넓어졌고, 어느새 나는 그의 개인 비서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걸 깨달았다. 거절하면 될 일인데, 나는 늘 어정쩡하게 웃으며 그의 부탁을 들어주고 있었다.
"도윤아, 부탁 하나만."
태현이 다가오며 씩 웃었다. 그 웃음은 늘 같은 모양이었다. 눈꼬리가 살짝 접히고,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가는. 나는 그 웃음의 다음에 따라올 말이 뭘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예상이 틀린 적은 거의 없었다.
"매점 가서 아이스아메리카노 두 개만 사와줄래? 계산대에 그 누나 있잖아, 은채 누나."
"...네가 사면 되잖아."
나는 일단 반문을 던졌다. 매번 순순히 받아주면 다음엔 더 큰 부탁이 돌아온다는 걸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다.
"아, 나는 지금 좀 바쁘거든. 그리고 너 걔랑 말 잘 통하잖아."
말 잘 통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어제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고 도망치듯 나온 게 전부였다. 그것도 말이 통해서가 아니라, 말이 통하지 않을까봐 도망친 거였다. 그녀의 밤 얼굴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낮의 그녀 앞에서는 오히려 나를 더 어색하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태현은 뭔가를 오해하고 있는 눈치였고, 나는 그 오해를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나조차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정정하는 순간 뭔가 소중한 것을 흘려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을 뿐이다.
"그 누나 진짜 예쁘지 않냐? 나 요즘 저 누나한테 관심 좀 있어."
태현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손끝이 살짝 굳는 걸 느꼈다. 커피를 마시지도 않았는데 목구멍이 서걱거렸다.
"관심이라니, 그냥 손님으로 보는 거 아니었어?"
"야, 남자가 예쁜 여자한테 관심 있는 게 뭐 이상해? 다음에 소개팅 자리라도 만들어봐. 너 옆집이라며."
순간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심장 소리가 태현에게 들릴까 봐 나는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떻게 알았어?"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온 것 같았다. 태현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어제 매점에서 네가 카드 낼 때 걔가 너 쳐다보는 눈빛이 좀 익숙하더라고. 이웃끼리 인사라도 했나 싶었지."
태현이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나는 그 안에서 위기를 느꼈다. 그저 눈빛 하나로 짐작한 거라니, 그마저도 아슬아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태현이, 아니 학교 전체가 은채의 밤 얼굴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낮의 완벽한 이미지와 밤의 나태한 진짜 모습, 그 간극이 소문으로 퍼지고 놀림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그 낙차를 재미있어할 것이다. 완벽했던 사람이 무너지는 걸 구경하는 건, 어쩐지 모두가 좋아하는 오락 같은 거니까.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왜 안 되는지 나는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냥 그건 지켜야 할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우연히 주워든 소중한 물건을 남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처럼. 길에서 우연히 주운 반짝이는 조약돌 하나를,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주머니 속에 숨겨두고 싶은 마음. 딱 그런 종류의 감정이었다.
"그냥 옆집이야. 인사만 몇 번 했어."
"그럼 됐네. 그럼 오늘 아이스아메리카노 갈 때 슬쩍 물어봐줘. 나 소개 좀 시켜달라고."
나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은 복잡했다. 심부름꾼 취급을 당하는 것도 짜증났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태현의 관심이 은채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름 붙이기를 미뤘다.
질투일까?
아니, 그럴 리 없었다.
그럼 뭘까?
결국 나는 매점으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내내 발걸음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이 유난히 눈을 찌르는 것 같아서 나는 몇 번이나 눈을 찡그렸다. 매점 문을 밀고 들어가자 진열대 사이로 낯익은 얼굴들이 몇 보였다. 계산대 앞에 서니 은채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흘긋 보았다. 낮의 얼굴이었다. 완벽하게 정돈된, 손님을 상대하는 얼굴. 그날 밤, 옆집 베란다에서 흐트러진 머리로 라이터를 만지고 있던 그 얼굴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아이스아메리카노 두 개요."
"네."
짧은 대답. 나는 카드를 내밀며 괜히 목이 마른 것 같았다. 그녀가 음료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뭔가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했다. 잘 지내세요, 라든가, 어제는 괜찮으셨어요, 라든가. 하지만 그런 말들은 전부 낮의 그녀 앞에서 꺼내면 선을 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낮의 그녀에게는 어젯밤의 그녀를 아는 척할 수 없었다. 그건 그녀가 지키고 싶어 하는 선일 것 같았으니까. 그 선을 내가 먼저 넘을 자격은 없었다.
기계 소리가 낮게 울리고, 얼음이 컵 안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계산대 위에 놓인 그녀의 손끝을 괜히 바라보고 있었다. 손톱이 짧게 정리되어 있었다. 어제 라이터를 쥐고 있던 손과 같은 손이라는 게 이상하게 낯설었다.
음료를 받아 돌아서는 순간, 나는 그녀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터, 고마웠어요."
너무 작은 목소리여서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말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순간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마치 낮의 벽 너머로 밤의 그녀가 살짝 손을 내밀어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건 그저 예의상 던진 인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몇 번이나 속으로 되새기며, 그 한마디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붙이고 싶어했다.
돌아오는 길, 태현에게 음료를 건네주면서도 나는 그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낮의 여신이, 밤의 자신을 아는 나에게 던진 아주 작은 신호.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 비밀을 지켜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느꼈다. 아무도 몰라야 했다. 태현도, 다른 누구도. 이건 오직 나와 그녀만이 아는 이야기여야 했다.
"고맙다, 도윤아. 그래서 물어봤어? 소개팅?"
태현이 컵을 받으며 눈을 반짝였다. 나는 순간 대답을 머뭇거렸다.
"...아직."
"에이, 좀 적극적으로 좀 물어봐줘라. 나 진짜 관심 있다니까."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태현이 계속 관심을 드러낸다면, 그리고 그 관심이 점점 노골적으로 변한다면, 내가 아는 진짜 은채가 그의 손에 들어가는 걸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 태현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었고, 겉으로 보기엔 나쁘지 않은 상대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가 은채의 진짜 모습을, 담배 냄새와 흐트러진 머리와 나태한 눈빛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하면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생각만으로 나는 커피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불안을 대신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비밀을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지금이, 어쩌면 가장 안전한 순간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안전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나는 전혀 확신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