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매점 여신의 심야 정체

4화

그날 오후, 지아가 나를 학생회관 옥상 벤치로 불러냈다. 문자는 딱 한 줄이었다. "옥상, 지금, 안 오면 후회할 거야." 지아답게 협박 반, 호기심 유발 반이었고, 나는 별수 없이 계단을 두 칸씩 올라갔다. 옥상은 흡연자들이나 가끔 올라오는 곳이라 조용했고, 낮인데도 바람이 제법 세게 불어 난간 옆에 세워둔 화분 몇 개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아는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아 이어폰을 한쪽만 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 이어폰을 아예 빼서 주머니에 넣고, 위아래로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너, 요즘 좀 이상해." "뭐가?" 나는 벤치 반대쪽 끝에 엉덩이를 걸치며 물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심드렁한 얼굴을 만들려고 했지만 지아는 그런 얼굴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태현이가 은채 언니한테 관심 있다고 할 때, 너 표정 봤어? 완전 굳어 있더라." 그 순간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강의실 앞 복도, 태현이 웃으면서 던진 그 말. "은채 선배 되게 괜찮던데. 나 소개팅 좀 시켜줘." 그 말을 듣던 내 얼굴이 어땠는지는 나도 못 봤다. 하지만 지아는 봤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게 뭐. 그냥 좀 신경 쓰이는 거지, 걔가 자꾸 심부름 시켜서." "심부름 때문이라고?" 지아가 코웃음을 쳤다. 짧고 날카로운, 믿지 않는다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는 웃음이었다. "도윤아, 너 스스로한테 솔직해져 봐. 태현이가 소개팅 얘기 꺼낼 때 네 얼굴이 그렇게 안 좋아진 게, 심부름 시켜서라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그럴싸한 문장을 찾지 못해 다시 다물었다. 지아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바람이 지아의 앞머리를 흩뜨렸고, 지아는 손으로 대충 넘기며 말을 이었다. "너는 항상 그래. 뭘 하든 이유를 그럴싸하게 포장해. 필름 카메라 들고 다니는 것도, 손으로 원두 갈아서 커피 내리는 것도, 다 좋아하는 거 나쁘다는 게 아니라—그게 진짜 네가 좋아서 하는 건지, 남들이 그렇게 봐주길 바라서 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는 거야." 뼈아픈 말이었다. 나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정확히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 필름 카메라는 정말 좋아서 산 거였다. 원두를 손으로 가는 것도, 그 냄새와 소리가 좋아서였다. 그런데 지아의 말을 듣고 나니, 그 좋아함 안에 얼마만큼의 진짜와 얼마만큼의 연출이 섞여 있는지 나조차 확신할 수 없어졌다. "그게 지금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목소리가 조금 날카롭게 나왔다. 지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다리를 풀고 몸을 내 쪽으로 돌렸다. "상관 있지. 너 은채 언니한테 뭔가 있는 거잖아. 근데 넌 그것도 인정 안 하고, 태현이가 관심 보이니까 속으로만 끓고 있고. 그거 딱 너답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반박이 아니라 질문이었다는 게 스스로도 놀라웠다. 지아는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솔직해지라고. 척하지 말고. 너 지금 스스로 만든 캐릭터에 갇혀서 진짜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 그런 식으로 계속 가면, 너 태현이가 은채 언니 채가는 거 보고도 아무것도 못할걸." 그 말이 유난히 아프게 박혔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남들과 다른 취향, 남들과 다른 감성, 남들과 다른 시선.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캠퍼스의 사람들이 다 비슷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비슷한 표정으로 걷는 걸 보면서, 나는 저들과 나는 다르다고 은근히 믿어왔다. 그런데 지아의 말대로라면, 나는 그 특별함이라는 껍데기 안에 진짜 감정을 숨기고 있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껍데기가 두꺼워질수록, 안에 있는 게 뭔지 나조차 잊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위장. "그러는 너는? 넌 태현이한테 왜 그렇게 날카로워?" 나는 반격하듯 물었지만, 지아는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식 웃으며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난 걘 그냥 무식해서 싫은 거야. 너랑은 다른 얘기지." "무식한 게 왜." "몰라도 돼. 지금 우리 얘기는 네 얘기잖아." 지아는 그렇게 대화를 다시 내 쪽으로 돌려놓았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고, 지아도 굳이 더 몰아붙이지 않았다. 옥상 위로 구름이 지나가면서 잠깐 그늘이 졌다가, 다시 해가 났다. 그 사이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화는 그렇게 흐지부지 끝났지만, 나는 옥상을 내려오면서도 그 말들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척하지 말라는 말. 진짜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말. 캠퍼스를 가로질러 걷는 내내 나는 지아의 문장들을 하나씩 곱씹었다. 나는 필름 카메라를 목에 걸고, 손으로 원두를 갈고, 밤늦게 인디 음반을 들으며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겨왔다. 취향이라는 이름의 방패, 감성이라는 이름의 갑옷. 그것들로 나를 둘러싸고 나면 남들과 구별되는 무언가가 된 것 같아 안심이 됐다. 하지만 정작 은채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꺼내지 못했다. 그녀가 낮에 보여주는 완벽한 얼굴 앞에서도, 밤에 보여주는 나태한 얼굴 앞에서도, 나는 그냥 어색하게 인사만 건네는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카메라도, 커피도, 음반도 그 순간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저 나는 그녀 앞에서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꺼내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방에 들어와서도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턴테이블에 좋아하는 판을 걸었지만 음악은 그저 배경음일 뿐이었고, 머릿속은 지아의 말과 태현의 웃음, 그리고 은채의 얼굴로 어지럽게 뒤섞였다. 태현이 웃으면서 소개팅 얘기를 꺼내던 그 무심한 표정, 지아가 나를 쏘아보듯 바라보던 눈빛, 그리고 며칠 전 밤 옆집 베란다에서 마주쳤던 은채의 얼굴이 순서 없이 겹쳐졌다. 책상 위에 던져둔 필름 카메라를 괜히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오늘은 그것마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창밖으로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을 때쯤, 나는 무의식적으로 베란다로 나갔다. 오늘 밤 그녀가 다시 나올지 어떨지도 모르면서, 그냥 그곳에 서 있고 싶었다.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몸이 먼저 그쪽으로 움직였다.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늦은 계절의 밤바람은 옷깃 사이로 스며들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고, 나는 그 서늘함이 오히려 낮 동안의 어수선한 생각을 조금 가라앉혀주는 것 같아 나쁘지 않았다. 나는 난간에 팔을 기대고 옆집 베란다를 흘긋 바라보았다. 불이 꺼져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매일 밤 그 자리에 나온다는 법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괜히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이유도 명분도 없는 기대. 지아의 말대로, 나는 또 이유를 그럴싸하게 포장하려던 걸까.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 그냥 보고 싶었던 거라고—그렇게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괜히 김이 빠진 채로 돌아서려는 순간, 옆집 창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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