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옥상 철제 문이 바람에 흔들리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이도윤은 그 소리보다 자신의 숨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젖어 있었고, 안경다리를 자꾸 밀어 올리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는데, 그 떨림을 감추려고 주먹을 쥐었다가 다시 펴는 것을 반복했다. 4월치고는 유난히 차가운 바람이 옥상을 훑고 지나갔고, 그 바람에 실려 온 소독약 냄새 같은 것이 코끝을 스쳤는데, 도윤은 그것이 아래층 화학실에서 흘러나온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긴장이 만들어낸 착각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윤소라는 난간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교복 리본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였던 게 언제였는지, 도윤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가 이내 지금 상황과는 아무 상관없는 감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지워버렸다. 소라의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에 흩어져 있었고, 그 아래로 드러난 눈동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맑아 보였는데, 그 맑음이 지금 이 순간 도윤에게는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할 말 있다며." 소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밝았지만, 그 밝음이 도윤에게는 이상하게 낯설었다. 마치 누군가 미리 짜놓은 대본을 읊는 듯한, 그런 착각이 잠깐 스쳤다가 사라졌다.
도윤은 몇 번이나 연습했던 말을 떠올리려 애썼다. 어젯밤에도 방 안에서 혼자 몇 번이나 연습했던 문장들이었다. 거울 앞에 서서 입 모양을 맞춰보고, 어떤 억양이 자연스러운지 고민했던 그 시간들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는데, 막상 눈앞에 소라를 두고 나니 그 문장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마음을, 이제는 정말로 꺼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던 그 말을, 도윤은 다시 한번 목구멍 안쪽에서 끌어올리려 했다.
"나, 소라야." 목이 메어 다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너를……."
말끝이 허공에 매달린 채 흩어졌다. 도윤은 자신의 목소리가 이렇게 가늘게 떨릴 수 있다는 것을, 그 순간 처음으로 알았다.
그 순간 계단 쪽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도윤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김유하와 강나윤, 박소희가 휴대폰을 든 채 서 있었고, 유하의 손에 들린 화면에는 이미 촬영이 시작되었다는 빨간 점이 깜빡이고 있었다. 세 사람의 실루엣이 계단 난간 사이로 비쳤을 때, 도윤은 그것이 그저 지나가던 아이들이기를 잠깐 바랐다. 그 바람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는, 나윤의 다음 말로 곧바로 확인되었다.
"성공이네." 나윤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진짜 고백하는 거 봐."
도윤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소라를 돌아보았다. 소라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데는 채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 도윤은 소라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죄책감이었는지 그저 당황함이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미안." 소라가 짧게 말했다. "이거, 원래 벌칙 게임이었어. 어제 게임에서 진 사람이 좋아하는 척 연기해서 상대 고백 받아내기." 담담한, 지나치게 담담한 목소리였다. "네가 나 좋아하는 거 다들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재미있을 거 같다고, 걸린 거야."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귀 안쪽에서 이명 같은 소리가 울렸고, 시야 끝이 흐려지는 것 같았는데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상했다. 울어야 할 순간에 눈이 그저 뜨겁기만 했다. 발밑의 콘크리트 바닥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고, 신발 밑창을 통해 전해지는 그 딱딱한 감촉이,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잔인하게 확인시켜주었다.
"야, 표정 봐." 소희가 카메라 각도를 도윤 쪽으로 더 기울이며 말했다. "완전 실화냐."
"찍지 마." 도윤이 낮게,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자신의 목소리가 이렇게 낯설게 들린 적이 없었다.
"왜, 이거 완전 웃긴데." 유하가 낄낄거리며 대꾸했다. 휴대폰 화면 속 빨간 점은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고, 그 규칙적인 점멸이 도윤의 심장 박동보다 오히려 더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도윤은 뒷걸음질 쳤다. 등이 옥상 난간에 닿았고, 차가운 철제의 온도가 셔츠를 뚫고 그대로 등줄기에 스몄다. 도망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그 순간 처음으로 몸으로 체감했다. 난간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축구를 하고 있었고, 그 평범한 풍경이 지금 옥상 위의 상황과 너무도 대조적이어서, 도윤은 순간 자신이 다른 세계에 갇혀버린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오빠, 나랑 계속 친구할 거지?" 초등학교 운동회 날, 소라가 넘어져 무릎이 까졌을 때 도윤이 손수건을 건네며 들었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그때 소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웃으며 그렇게 물었었다. 손수건에는 그 무렵 도윤이 좋아했던 만화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고, 소라는 그걸 보고도 눈물 콧물 범벅인 채로 웃었었다.
그 사실을 지금 떠올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도윤은 그 기억이 소라와의 관계를 지탱해주는 어떤 확신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카메라 렌즈 너머로 자신을 비추는 소라의 눈빛을 보면서, 도윤은 그 확신이라는 것이 애초에 자신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소라야." 도윤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자신도 모르게 어떤 기대가 섞여 있었는데, 그 기대가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는 도윤 자신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대답 대신 소라는 시선을 피했다. 유하의 카메라가 그 침묵까지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자, 그럼 소감 한마디." 나윤이 휴대폰을 도윤의 얼굴 앞으로 들이밀며 낮게 웃었다. "이도윤, 지금 기분이 어때?"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목구멍이 완전히 막혀버린 것 같았고, 뭔가 말을 하려 해도 입술만 몇 번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카메라 렌즈가 그 실패한 시도들까지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담아내고 있었고, 나윤은 그 모습이 재미있는 듯 낮게 웃음을 흘렸다.
바람이 다시 한번 옥상을 훑고 지나갔다. 소라의 리본이 흔들렸고, 그 흔들림을 보던 도윤의 시선이 문득 흐려졌다. 그 침묵조차 오늘 하루가 시작되는 신호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